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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불교사 100장면> 정리

by iamcool 2022. 10.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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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 100장면

202210121독 및 정리

 

<< 인도불교 >>

 

< 1장 불교 여명기의 흐름 >

- 불교 탄생의 배경

 

1. 인더스 문명의 발생과 아리안족의 침입

1) 인더스 문명의 발생과 종언

* 기원전 2500년경 부터 인더스 문명이 발생

* 기원전 1500년경 아리안족의 침입으로 인더스 문명 멸망

 

2) 베다의 집대성과 브라만교의 탄생

* 기원전 1500년경 베다가 체계화된다= 베다의 문자화

* 기원전 1000년경 브라만교의 성립

- 전쟁의 신 인드라를 주신으로 모시던 구조에서 세계를 창조한 브라흐만을 중심으로 변모하게 되는데, 이로써 탄생하는 종교가 바로 브라만교이다.

* 아리안족은 씨족제 농경 사회를 형성하면서 견고한 신분 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만들어 낸다.

 

3) 우파니샤드의 성립과 브라만교의 한계

* 기원전 800년경에는 브라만교의 성전인 베다에 철학적인 해석을 입힌 우파니샤드 시대가 열린다.

 

 

2. 도시 국가의 발달과 신흥 사문의 형성

1) 갠지스 강 유역의 도시 국가 발달과 아리안족 문화의 약화

* 기원전 600년경 갠지스 강 유역에 도시국가 16국이 성립

 

2) 신흥 사문의 탄생

* 기원전 600년경 신흥 사상가와 신흥 종교가인 사문(沙門)’의 탄생

- 육사외도 등 사문 집단 성행

 

3) 자본가와 왕족의 지지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사문

* 자본가와 왕족은 브라만보다 사문을 지지했다.

* 사문들은 수행법에 있어 고행과 같은 개인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3. 윤회, 해탈에 대한 브라만교와 불교의 관점 차이

1) 세상은 창조되었는가, 순환하는가

* 유목문화- 창조론/ 농경문화- 순환론

* 브라만교는 창조신이 등장하는 창조론을 채택하는 반면, 불교는 자연의 원리에 따른 순환론을 수용하게 된다.

 

2) 세상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 윤회란 사람이 옷을 바꾸어 입듯 정신의 본질은 상속되고, 육체만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 브라만교는 윤회에 대해, 가장 핵심적인 본질은 바뀌지 않고 영속한다고 주장한다.

- 이때 본질은 아트만, 라고 본다.

* 불교에서는 안아트만, 즉 무아를 주장한다.

* 브라만교- 아윤회/ 불교- 무아윤회

 

3) 절대자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1) 브라만교에서는 아트만과 브라흐만의 결합, 범아일여를 주장

- 개별적인 존재인 아트만과 창조주인 브라흐만이 하나가 되면 변화와 유한성에 속박된 아트만은 무한 불변의 자유로 거듭나게 된다.

(2) 불교에셔는 검증 불가능한 신의 존재를 배제한다. 불교에서는 안아트만, 변화하는 실체를 주장한다.

 

 

4. 육사외도의 등장과 그 사상적 특징

1) 사상계의 혼란과 육사외도의 등장

* 육사외도의 등장

- 불교와는 다른 철학적 견해를 가진 여섯 사문, 또는 그 사문을 따르는 집단을 말한다.

* 육사외도의 사상가는 대체로 요소론(적취설)의 관점에 입각한 유물론이나 숙명론, 또는 도덕부정론을 주장하였다. 또한 윤회를 끊는 해탈의 방법으로 고행을 제시하고 있는 것도 다수 목도된다.

 

2) 신을 배제한 사문이 세계를 이해한 방법, 적취설

* 적취설

- 이 세상의 구성 물질로서 다양한 요소들이 존재하며, 이것의 결합 차이가 현상적인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주장

*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세계 구성 요소= 사대+ 오온+ 십팔계

 

cf) 자이나교

* 자이나교의 근거는 이원론에 있다. 모든 존재는 영혼(Jiva)적 존재와 비영혼(Ajiva)의 존재로 나뉜다는 것이다.

- 자이나교는 불살생과 무소유를 특히 강조

- 신도들은 상업에 종사

 

 

 

 

< 2장 붓다의 등장과 불교의 성립 >

붓다의 생애와 불교

 

5. 가비라국 왕자, 붓다의 탄생

1) 위기의 가비라국

* 기원전 624? 붓다는 현재의 네팔 지역에 해당하는 소국 가비라의 첫째 왕자로 태어났다.

 

2) 붓다의 가계

* 붓다는 정반왕과 마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3) 석가족의 기대를 받으며 탄생한 왕자

* 여섯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의 태몽

* 48일 룸비니에서 붓다 탄생

- 탄생 직후 붓다는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왼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위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라는 게송을 천명했다.

 

cf) 붓다의 이름과 칭호

* 깨달음을 얻기 전, 붓다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 석가모니는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는 의미

* ‘붓다깨달은 분’, ‘깨달음의 완성자를 뜻하는 일반명사지만 불교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석가모니를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고착되었다.

* 이밖에 여래’, ‘세존’, ‘석존등이 있다.

 

 

6. 왕궁에서의 생활과 사문유관

1) 안락하고 호화로웠던 왕자 시절

* 붓다는 여러 분야에 걸쳐 교육을 받았다.

- 주된 과목은 통치술, 무술, 어학이었는데 이는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에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2) 야소다라와의 결혼과 아들 라후라의 탄생

* 붓다는 19세에 이웃 나라 콜리국의 공주이자 선각왕의 딸인 야소다라와 결혼한다.

* 붓다는 29세에 출가했다.

 

3) 사문유관을 통한 생로병사의 인식

* 사문유관이란 붓다가 왕궁의 동, , , 북 네 문을 차례로 나가면서 각각 노인과 병자, 그리고 죽은 자와 사문(승려?)을 목격하게 되고 마침내 출가를 결심한 일을 말한다.

 

 

7. 붓다의 출가와 고행

1) 부귀와 명예를 버리고 감행한 출가

* 붓다는 28일 새벽, 동쪽 문을 통해 성을 빠져나가 출가한다.

- 이것은 진정한 자유를 향한 도전으로서 서양에서는 출가를 위대한 포기라고 칭한다.

 

2) 붓다가 만난 세 명의 스승

* 박가바(고행주의자)-> 아라다 카라마(명상주의자)-> 웃다카 라마풋타(명상주의자)

 

3) 독자적으로 시작한 고행과 포기

* 6년 고행

- 붓다는 명상을 버리고 고행을 선택했다.

 

 

8. 붓다의 깨달음

1) 6년 고행의 포기와 깨침

* 고행을 포기한 붓다는 128일 샛별이 떠오르는 새벽에 부다가야 보리수 아래에서 동쪽을 향한 상태로 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

 

2) 깨달음의 핵심, 연기

* 붓다가 깨달은 내용은 요소들의 관계성에 입각한 연기이다.

- 연기는 공간적인 상호관계성을 의미하는데, 흔히 시간적 연속의 개념인 인과와 더불어 인과연기’, 줄여서 인연이라고도 한다.

* 연기는 연기법이라고도 하는데, 불교에서는 연기를 고정 불변의 법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연기법은 붓다가 깨달은 요소 간의 결합 원리이다. 이 결합 원리를 해체하게 되면 결합, 즉 속박은 사라지고, 윤회의 사슬은 끊어지게 된다.

* 초기불교의 연기법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십이연기’, 즉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열두 가지 변화 구조를 의미한다. 그런데 부파불표 시대에 들어서면 행위에 대한 과보의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고, 연기법은 업감연기로 설명되기에 이른다.

 

3) 연기와 열반

* 연기법은 요소의 해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윤회의 소멸로 열반이라는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9. 가르침의 전개와 교단의 형성

1) 깨달음을 얻은 붓다의 환희와 고뇌

* 붓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 49일 동안 법열, 즉 깨달음의 환희에 젖어 있었다.

* 법열에서 깨어난 뒤 붓다는 설법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고뇌하였다.

- 붓다는 브라흐만의 간청으로 설법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2) 붓다의 첫 설법과 삼보의 확립

* 붓다는 바라나시의 사르나트, 즉 사슴동산에서 다섯 비구를 만나 가르침을 전한다.

- 이 사건을 초전법륜이라고 부른다.

* 다섯 비구의 교화를 통해 불교의 삼보 중 마지막인 이 갖추어지게 된다.

 

 

10. 붓다가 처음으로 설한 가르침

1) 중도와 팔정도, 사성제(63 페이지 참조)

(1) 중도

* 붓다의 중도는 엄밀하게 말하면 고락중도’, 고통과 즐거움의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올바름이란 의미이다.

 

(2) 팔정도

* 중도를 세분화한 원칙

 

(3) 사성제

* 불교 수행의 목적을 나타내는 교리 체계

 

2) 전법의 확대와 2대 정사의 탄생

(1) 바라나시의 야사와 54인의 친구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받는다.

- 야사의 부모는 각각 불교사상 최초의 남성 신도와 여성 신도가 된다.

-> 이로써 출가인과 재가인으로 구성된 교단의 기본적인 구조가 완비된다.

 

(2) 2대 정사의 탄생

*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에 최초의 사원 죽림정사가 건립

* 코살라 국의 수도 사위성에 7층 대가람 기원정사 건립

 

 

11. 계율의 성립과 10대 제자

1) 교단의 확대와 율의 제정

* 율장에 따르면 불교 승단에서 계율이 생긴 것은 붓다가 깨달음을 증득하고 5~7년 뒤라고 되어 있다.

 

2) 율의 목적과 발전

* 율은 불교 교단 안에서 법과 같은 역할을 한다.

* 율을 모아 기록한 율장은 남북전육부율이라고 하여 크게 남방불교와 북방불교로 전해진 6종이 현존하고 있다.

- <빨리율>, <사분율>, <오분율>, <십송율>, <마하승기율>, <유부율>

 

3) 다양성이 용인되는 불교 교단

* 다양한 교육 방법을 용인

- 대제자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그룹을 만들어 수행

 

4) 전문 영역을 가지고 있는 대제자와 10대 제자

* 10대 제자

- 사리불, 목건련, 마하가섭, 수보리, 부루나, 가전연, 아나율, 우바리, 라후라, 아난

 

 

12. 복제를 통해 본 중도의 유연함

1) 사회의 요구를 반영한 복제 개혁

* 붓다의 중도주의는 하나의 원칙을 세우고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른 적절성을 원칙으로 한다.

* 복제 개혁

- 붓다는 세상의 요구를 간파하고, 깨끗한 천을 마치 보도 블럭처럼 재단하고 봉재해서, 인위적으로 누더기를 만든 뒤 황토로 염색한 옷을 입게 하는 복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2) 승가리 착용에 나타나는 중도주의의 유연함

* 붓다는 승려들이 일반인들과 대면해야 하는 탁발 때나 왕궁에 출입할 때는 반드시 승가리를 착용하도록 규정했다.

 

3) 의복에 나타난 상대방에 대한 배려의 정신

* 붓다는 무소유보다는 상대에 대한 배려에 집중하였다.

 

 

13. 세계 종교 최초로 여성 성직자를 허용한 불교

1) 여성 성직자를 인정한 붓다

* 붓다는 여성을 독립적이 인격체로 보고, 출가를 허용했다.

- 세계 종교 가운데 최초로 여성 성직자를 인정한 종교.

 

2) 아난의 간청으로 허락된 여성의 출가

* 붓다가 깨달음을 증득한 지 20년 뒤에 여성의 출가를 허용했다

- 붓다의 이모 대애도의 출가요구-> 아난의 간청-> 붓다가 여성 출가를 허용

 

3) 여성 출가에 대한 비판과 반발

* 여성 출가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교단 내 비판이 많았다.

 

cf) 팔경계

* 구족계

- 출가(出家)한 비구 ·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

* 안거

- 여름 3개월과 겨울 3개월 동안 출가한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 외출을 금하고 수행하는 불교제도.

* 자자

- 하안거(夏安居)를 마칠 때 하는 행사. 같이 안거에 들었던 승려들이 자신이 지은 죄를 다른 승려들 앞에서 고백하고 참회한다.

 

 

14. 오법을 제기한 제바달다의 소요

1) 거대화된 교단과 중도주의를 오해한 혼란

* 중도주의에 입각한 붓다의 유연성은 불교 교단의 확대와 더불어 엄격주의로부터의 비난을 가져왔다.

* 제바달다가 72,3세의 붓다에게 엄격주의를 따르자고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

 

2) 제바달다의 주장과 비판

* 제바달다는 붓다의 사촌동생이자 아난의 친형이다.

* 제바달다는 극단적인 엄격주의자로 <오법>을 주장

- 오법은 82 페이지 참조

 

3) 중도주의와 엄격주의의 분파

* 제바달다는 자신의 엄격주의를 지지하는 일군의 무리들과 더불어 불교의 한 분파를 형성하게 된다.

 

 

15. 붓다의 열반과 엄격주의의 승리

1) 사리불, 목건련의 입적과 교단의 공백

* 붓다의 수제자는 사리불과 목건련이다.

* 사리불과 목건련은 붓다 보다 먼저 입적-> 교단의 공백

 

2) 붓다의 입적을 기준으로 하는 불기

* 기원전 544?(80) 붓다는 바이샬리에서 마지막 안거를 끝으로 쿠시나가르에서 입멸한다.

* 불교에서는 붓다가 입적한 해를 기준으로 불기를 계산하게 된다.

 

3) 엄격주의자 마하가섭의 교단 주도

* 붓다의 입적 이후 교단의 주도권은 엄격주의자인 마하가섭에게 넘어간다.

- 마하가섭은 두타행자였는데, 두타행은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엄격한 실천 원칙을 지키며 하는 수행을 말한다.

* 마하가섭은 붓다 입멸 후에도 붓다 당시의 계율을 그대로 유지하도록 했다.

 

 

16. 마하가섭이 주도한 1차 결집

1) 붓다의 장례를 주도한 마하가섭

* 마하가섭은 붓다가 열반하고 입관한 이후에야 500인의 무리와 함께 도착했다.

* 곽시쌍부

- 붓다가 입관된 상태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밀어 마하가섭의 예경을 받아준 일

 

2) 사리를 모시고 불탑을 건립하는 재가인

* 사리 수습과 탑 건립은 재가인들의 몫

 

- 붓다의 장례 절차 중 화장까지는 마하가섭을 중심으로 한 승려들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사리의 분배부터는 당시 인도 최고의 강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왕 아사세의 주도로 향성 바라문이 진행한다.

- 붓다의 사리는 8개국(지역)에 분배 되었고 각기 불탑(근본 8)을 건립했다.

 

3) 마하가섭이 주도한 경전 편찬 회의

* 기원전 544? 1차 결집

- 마하가섭의 주도로 마가다국 외곽의 산 중턱에 위치한 칠엽굴에서 승단 대표 500인이 3개월간 결집

- 율장과 경장이 성립

- 1차 결집은 문자 기록을 하지 않았다.

 

 

17. 마하가섭과 아난의 관계

1) 초기 교단을 주도했던 석가족과 왕사성파

(1) 왕사성파

*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2년 후 왕사성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교화에 성공하면서 시작된다.

- 가섭 삼형제 세력이 붓다에게 귀의-> 사리불과 목건련 세력이 붓다에 귀의-> 사리불과 목건련 입멸 후 이 세력 중 일부는 마하가섭 쪽으로 옮겨 간다.

 

(2) 석가족 집단

* 붓다가 출가한지 8년 뒤 고국인 가비라국으로 귀향했을 때, 붓다의 사촌들이 중심이 되어 형성

 

2) 석가족 집단과 왕사성파의 충돌

(1) 석가족과 왕사성파의 두 번의 충돌

a) 붓다 만년 교단의 승계 문제로 제바달다와 사리불의 충돌

- 사리불의 왕사성파가 승리하고, 제바달다는 교단에서 독립

 

b) 붓다 입멸 후 쿠시나가르에서 장례 주관 문제로 충돌

- 아난이 독자적으로 장례를 치르려 했으나 결국 마하가섭이 장례와 1차 결집을 주도

- 1차 결집 때도 아난과 마하가섭이 계율 문제로 충돌-> 마하가섭의 주장이 통과

 

(2) 최종 승리는 석가족

* 마하가섭이 붓다 입멸 20년 뒤 계족산에 들어가 최후의 선정에 들자 불교 교단은 아난의 주도로 재편된다.

* 붓다 입멸 후 100년 뒤 2차 결집에서, 불교 교단을 대표하는 고승 여덟 명 중 여섯 명이 아난의 제자

 

 

 

 

< 3장 불교의 발전과 역류의 발생 >

- 부파불교의 시작

 

18. 확대되는 불교에서 발생한 균열

1) 서쪽으로 교화의 영역을 넓히는 불교

* 붓다 당시 불교는 인도 동쪽의 갠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 붓다 입멸 이후 아난이 서쪽으로 진출

- 붓다의 입적 20년 뒤 마하가섭의 뒤를 이어 아난이 교단을 주도

* 서쪽 교단은 붓다 입적 100년 정도가 지나 동쪽 교단과 필적하는 세력으로 자라게 되고, 급기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2) 야사에게서 촉발된 열 가지 쟁점

* 서쪽 교단의 야사가 동쪽 교단의 관행을 보고 열 가지 문제(십사)를 제기

- 당시 서쪽 교단은 붓다의 원칙을 바꾸지 않고 준수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고, 동쪽 교단은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cf) 십사- 103 페이지 참고

 

3) 십사의 판결과 2차 결집

* 동쪽 교단과 서쪽 교단은 각 4인의 장로를 뽑았고, 이들은 만장일치로 십사가 정법이 아닌 비법, 즉 잘못된 행위라고 결정한다.

 

* 기원전 440년경 2차 결집(= 바이샬리 결집, 700결집)

- 십사 논쟁을 기점으로 가르침을 재정리하기 위해 바이샬리에서 8개월간 700인의 승려들이 모여 경전 편찬 회의를 개최한다.

 

4) 교단의 분열과 부파불교의 시작

* 십사 논쟁은 서쪽 교단의 승리고 끝나지만 결국 입장 차이로 동쪽 교단과 서쪽 교단은 나뉘게 된다.

- 서쪽 교단은 본래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서 상좌부라고 불렸고, 동쪽 교단은 보편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대중부라고 불렸다.

- 이 사건으로 불교 교단이 최초로 나뉘었기 때문에, 이를 근본분열이라고 한다.

* 교단 분열 이후 교단은 더욱더 다양하게 분열하여, 20부파 이상으로 분열된다.

 

 

19. 아소카 왕의 인도 통일과 불교 진흥

1) 인도 최초의 통일 군주 아소카의 불교 진흥

(1) 붓다 당시, 붓다를 후원해서 불교가 성립하고 안정될 수 있도록 도와준 최고의 왕은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와 그 아들인 아사세였다.

 

(2) 그러나 불교가 오늘날과 같이 세계종교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한 왕은 마우리아 왕조 3대 아소카였다.

* 붓다 입적 200여년 후의 인물인 아소카 왕은 전 인도를 최초로 통일하고 불교를 국교화하며 자비와 복지를 실천한 군주이다.

- 아소카 왕에 의해 북인도에 국한되었던 불교가 전 인도에 전파 되었다.

* 기원전 200년경 불교의 남방(스리랑카) 전파.

 

2) 잔인한 아소카와 복지의 아소카

* 아소카는 통일이라는 목적이 달성되자, 불교로 전향하고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며 최고의 복지 군주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3) 아소카의 불교 지원

* 아소카는 붓다의 성지를 순례하고 석주를 세웠다= 아소카 석주

* 아소카는 근본 8탑 중 7개를 열어 그 안의 사리를 나누어 전 인도에 84천 개의 탑을 건립하였다.

- 동쪽 교단의 권위 축소를 의미

* 아소카는 법대관이라는 종교사절을 만들었다.

 

4) 아소카 왕과 3차 결집

(1) 기원전 261년경 3차 결집(= 파탈리푸트라 결집, 1천 결집)

* 아소카의 후원 하에, 목갈리풋다 팃사 중심으로 파탈리푸트라에서 9개월간 1,000명의 승려 대표가 회의 진행

* 논장이 성립- , , 론이라는 삼장의 구조가 완비

 

cf) 경장, 율장, 논장

* 경장- 불경

* 율장- 율장 (律藏, 팔리어: Vinaya Piṭaka 비나야 피타카 )은 불교 교단의 계율을 집대성한 것이다.

* 논장- 불법(佛法)을 논한 책으로, 부처가 스스로 문답한 것과 여러 제자와 보살이 해석하여 논변(論辯)한 것을 모아 만들었다.

 

(2) 기원후 2세기 4차 결집

*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의 후원으로, 협존자와 세우의 주도하에 500명의 대표 승려들이 카슈미르에 모여 진행

*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이 정리됨

 

 

20. 스무 개의 부파로 재분열하는 불교

1) 불교 교단 재분열의 배경

* 붓다의 중도주의나 대제자들이 인도하면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수행 방법의 차이에 대한 용인, 그리고 지역과 문화에 따른 차이를 인정하는 붓다의 태도 등은 불교 분열의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2) 상좌부와 대중부의 재분열과 20부파의 성립- 114 페이지 참조

(1) 기원전 340년경 붓다 입멸 후 200년경부터 대중부의 분열 시작- 9개파로 분열

 

(2) 기원전 240년경 붓다 입멸 후 300년경부터 상좌부의 분열 시작- 11개파로 분열

 

(3) 20개부파의 성립= 대중부 9개파+ 상좌부 11개파

 

3) 부파분열의 원인

* 대제자를 리더로 수행 집단을 구성

* 지역에 따른 문화의 차이

* 철학적 관점이나 수행론에 따라

* 생활 방식의 차이

 

4) 발전이 초래한 어려움

* 부파불교의 성립과 발전으로 인해 불교는 점차 세밀해지고 어려워진다.

-> 부파불교가 계속해서 발전하게 되자, 승려들은 점점 더 민중의 생활과 유리된다.

* 종교개혁을 주장하는 대승불교운동이 촉발

- 이들은 부파불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등장했기 때문에 부파불교를 폄하하여 소승불교라고 부르게 된다.

 

 

 

 

< 4장 쉬운 불교에 대한 민중의 요구 >

대승불교의 등장

 

** 4장 대승불교의 시작 간단 정리

* 기원전 100년경 스리랑카에서 경전이 문자로 기록됨

* 기원전후 대승불교운동이 시작됨(불탑 중심)

* 기원전후(기원전 1세기-기원후 1세기 사이) 남인도에서 공 사상(반야경)과 화엄 사상(화엄경)이 발달

- 이후 공 사상은 중관학파, 유식학파로 발전/ 화엄 사상은 중국에서 화엄종으로 발전

* 1세기경 간다라, 미투라에서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함

* 200년경 용수와 그 제자 제바가 활동함

* 4세기 중관학파가 형성

* 400년경 미륵과 무찬, 세친이 활동, 유식학파가 등장함

* 500년경 4세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중관학파가 확립됨

 

21. 경전의 문자화와 대승불교의 등장

1) 구술과 암기를 통한 전승에서 기록을 통한 전승으로

* 기원전후가 되면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암기할 수 없을 정도로 암기 대상의 총량이 늘어나게 된다. 이로 인해서 경전의 문자화, 즉 성문화가 이루어진다.

 

2) 문자화된 경전이 초래한 재가인의 자각

* 기원전 100년경 스리랑카에서 경전이 문자로 기록됨

- 불교 경전이 최초로 문자화된 곳은 인도가 아닌 스리랑카 마탈레에 위치한 알루비하라 사원이었다.

* 경전의 문자화는 재가 중심의 대승불교가 성립하는 데 가장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3) 동시대에 함께 등장하는 대승불교

* 기원전 100년경 대승불교운동이 시작됨

- 대승불교는 특정한 불교 부파를 지칭한다기보다는 기원전후 성문화된 경전에 입각해서 일어난 종교 개혁이자 민중불교운동이다.

 

 

22. 붓다에 대한 그리움이 반영된 대승불교

1) 대승불교 발생의 한 가지 설, 대승잠복설

* 대승잠복설

- 붓다의 정신은 쉬운 불교이자 현실적이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불교였다는 자각

 

2) 아라한을 비판하는 보살주의

(1) 대승불교는 부파불교의 자기 공부와 수행에만 매몰된 형태를 비판하면서 제기된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의 핵심 슬로건은 부파불교의 자리와 반대되는 이타행이다.

* 자리- 수행하여 얻은 공덕을 자신에게만 돌림

* 이타행- 남에게 공덕과 이익을 베풀어주며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이행이라고도 한다.

 

(2) 보살이란 깨달음을 구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부파불교의 이상 인격인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를 끊어 버린 아라한과는 다른 개념이다.

* 대승불교에서는 붓다가 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을 바로 보살이라고 부른다.

 

(3) 재가보살과 출가보살

* 재가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보현보살

* 출가보살- 문수보살, 미륵보살, 지장보살

 

3) 교조 붓다의 위대함을 찬탄하는 찬불승의 등장

* 찬불승

- 붓다의 생애를 찬양하는 찬탄문을 가지고 일종의 거리 공연을 하는 공연자들

- 대표적인 인물은 100-160년경의 음유시인 마명

 

 

23. 불탑을 중심으로 붓다를 생각한 사람들

1) 신앙의 중심지로 부각되는 불탑

* 탑은 오늘날까지 붓다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상징물이다.

* 기원전후까지 대다수 인도 탑들은 아소카 왕의 84천 탑의 건립과 관련된 붓다의 사리를 모신 탑이었다.

* 부파불교의 승려들이 고답적인 어려운 교리에 매몰되자, 사원을 찾기 보다는 자유롭게 불탑을 찾는 사람들이 증가하게 되었고 불탑의 관리자 중 일부가 문화 해설사 겸 종교 안내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2) 불탑을 통해서 붓다를 설명하는 사람들

* 불탑 관리자를 통해 붓다의 생애가 알려 졌다.

- 담당자가 존재하게 되면서, 붓다의 생애는 보다 신앙적이고 극적으로 윤색된다.

- 교훈이 되는 본생담이라는 붓다의 전생 이야기를 활용하기도 했다.

 

3) 불탑 신앙과 연관된 <법화경>

* 불탑이 대승불교가 성립되는 배경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법화경>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다.

- 불탑과 대승주의

* 중인도에서 성립된 경전인 <법화경>에는 탑을 중심으로 하는 내용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 <법화경>에서 말하는 강력한 신앙 중심으로서의 불교 통합 구조는 이후 중국불교에서 천태종이 탄생하게 되는 배경이 된다.

 

 

24. 불상을 통해서 붓다를 보려는 사람들

1) 불상의 탄생에 얽힌 전설

* 기원전후(1세기경) 서북인도의 간다라 지방과 인도 내륙의 마투라 지역에서 불상이 제작된다.

- 붓다 입멸 후 불상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이전 500년간은 불상이 없던 시대, 즉 무불상 시대라고 한다.

 

2)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불상

* 붓다는 최후의 남음이 없는 무여열반을 통해서 진리와 하나 된 분이기 때문에 형상으로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다.

* 그러던 중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으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간다라 지역에서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했다.

 

3) 보살상에서 시작된 마투라 불상

* 마투라의 불상 제작자들은 붓다가 되기 전, 보살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25. 진리 자체로 붓다를 이해하는 사람들

* 남인도에서 공 사상(반야경)과 화엄 사상(화엄경)이 발전

* 공 사상은 중관 사상과 유식 사상으로 각각 발전

 

1) 반야공 사상을 통한 붓다의 이해

* 남인도에서는 반야공 사상으로 붓다를 이해

- 반야공에서 공이란, 일체의 실체가 없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공은 무가 아니기 때문에 현상은 작용으로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을 바로 아는 것이 반야이다.

- 일체는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며, 붓다는 형상으로 추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말한다.

 

2) <대반야경><금강경> 그리고 <반야심경>

* <대반야경>

- 반야부 경전 전체를 집대성한 경전

* <금강경>

- 대반야경 중 권577<능단금강분>이 바로 <금강경>이다.

- <금강경>은 중국으로 전래하여 선종의 핵심 경전으로 여겨진다.

* <반야심경>

- 대반야경의 정수를 핵심만 뽑아 압축한 것

- 북방 대승불교권에서 가장 폭넓게 수용되어 있는 경전

 

3) <화엄경>과 화엄 사상

* 남인도에서 화엄 사상이 시작

* <화엄경>의 핵심은 주관주의이다.

* <화엄경>은 중국불교에서 유행하면서 화엄종으로 발전하게 된다.

 

 

26. 용수의 공 사상과 이를 따르는 이들

* 인도 대승불교는 중국불교와 달리 경전보다 논서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한데, 그 핵심에 삼론인 <중론> <백론> <십이문론>을 중심으로 하는 중관학파와 유가의 5대부를 중심으로 하는 유식학파가 있다.

 

1) 용수(150년경-250년경)의 생애와 저술

* 용수는 세친과 더불어 인도 대승불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 ‘소석가‘8종의 조사라고 한다.

- 용수는 주로 남인도에서 활동

* 용수의 저서

- <대품반야경>의 주석서인 <대지도론>, <화엄경> 십지품의 주석인 <십주비바사론>을 비롯하여 중관학파에서 중요시하는 <중론> <십이문론> <회쟁론> <공십칠론> 등의 저술을 남겼다.

 

2) 용수의 팔부중도와 중관사상

- 200년경 용수와 그 제자 제바가 활동함

 

(1) 용수는 반야공의 원리를 제일의제와 세속제라는 두 가지 관점, 즉 진속이제설로 해석한다.

(2) 팔부중도를 제시

- 팔부중도란 모든 현상은 생하지도 멸하지도 않고, 단절되지도 항상하지도 않으며,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라는 관점으로 연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3) 이와 같은 사상을 연기=중도의 관점을 중심으로 한다고 해서 중관사상이라고 하는데, 후에 이를 따르는 학파를 중관학파라고 한다.

 

3) <백론>을 찬술한 제바(170년경-270년경)

* <백론>은 용수의 제자인 제바의 저술이다.

 

4) 중관학파의 성립과 전개

* 용수와 제바의 사상은 계승되어 후일 중관학파로 발전한다.

* 4세기를 전후하여 형성되기 시작한 중관학파는 6세기 초(500년경)에 확립되면서 크게 발전하게 된다. 이 시기 중관학파는 불호의 귀류논증파와 청변의 자립논증파로 나눠지게 된다.

 

 

27. 세친의 인식론과 이를 따르는 이들

- 400년경 미륵과 무착, 세친이 활동, 유식학파가 등장함

 

1) 유식학파의 시조인 미륵과 5대 논서

* 유식학파는 미륵에게서 시작되어 무착을 거쳐 세친이 완성한다.

* 유식이란 인식의 주체가 인식의 대상을 결정한다는 방식의 인식론이다.

* 유식학파의 시조는 미륵(350-430년경)

* 미륵이 강술하고 무착이 기록했다는 5대 논서

- <유가사지론> <분별유가론> <대승장엄경론송> <변중변론송> <금강반야경론송>

 

2) 무착의 역할과 저술

* 무착(395-470년경)의 저술

- <섭대승론> <현양성교론> <대승아비달마집론>

 

3) 세친의 생애와 저술

* 세친(400-480년경)의 저술

- <십지경론> <유식삼십송> <유식이십론>

 

4) 유식학의 내용과 유식학파의 발전

(1) 유식이란 우리가 보고 느끼는 일체의 모든 것은 인식이 만들어 낸 현상일 뿐이라는 뜻이다.

* 유식학에서는 우리가 보고 느끼는 일체는 변계소집성, 원성실성, 의타기성의 세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 이타기성을 바탕으로 변계소집성(본질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여 원성실성(존재하는 현상)을 성취해야 한다고 말한다.

 

(2) 유식에서는 인간의 의식 너머에 자신이라는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제7식이 존재하며, 그 바탕으로 집단무의식과 같은 8식이 존재함을 말한다.

 

(3) 세찬 이후의 유식학파는 유상유식파와 무상유식파로 나뉘게 된다.

-> 중국의 유가법상종이 형성

 

 

28. 아트만에 대한 요구와 붓다의 가능성

1) 아트만에 대한 인도인의 집착

* 윤회론을 배경으로 하는 인도문화에서 실체가 없이 윤회한다는 무아윤회의 주장은 받아들이기가 더욱 어려웠다.

 

2) 불교 내부에서 외도로 불린 독자부

* 독자부는 보특가라설을 주장

- 보특가라는 아트만과 유사한 의미로, 윤회하는 주체를 뜻한다.

 

3) 대승불교의 슬로건과 여래장이라는 안전장치

*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은 언젠가는 붓다가 된다고 본다.

* 여래장(여래의 태를 의미)은 안전장치가 되는 동시에 실체가 된다는 점에서 연기라는 변화 원리를 주장하는 불교의 핵심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4) 여래장에서 불성으로 전환하는 가치

* 여래장에서 불성으로의 전환

- <대반열반경>에서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갖추어져 있다라는 구절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 ‘여래장에서 불성으로의 전환실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위험하다.

<대반열반경>은 인도불교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불성사상은 중국불교로 전해지면서 선종 등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다.

 

 

 

 

< 5장 인도불교의 몰락과 부활 >

밀교의 등장부터 신불교 운동까지

 

29. 붓다가 완성이 아니라 시작인 밀교

1) 인도불교사의 서술이 빚어낸 오해

* 7세기까지 인도에서는 부파불교가 대승불교보다 세력이 컸다.

- 부파불교는 대승불교의 흥기 이후에는 두드러진 변화가 없었다.

* 대승불교는 북방으로 전래되었지만, 1203년을 기점으로 불교는 인도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2) 밀교의 시작과 전개 양상

(1) 밀교는 비밀불교라는 의미이다.

- 밀교의 특징은 주술적이며 제의적이며, 스승과 제자의 특수성에 입각한 비밀주의를 강조한다.

 

(2) 잡밀과 순밀

a) 잡밀

- 체계가 갖춰지기 전 밀교적인 요구가 점차 두각을 나타내던 시기의 밀교

 

b) 순밀

- 밀교가 자기원칙을 세우는 경전인 <대일경> <금강정경>을 확립하는 7세기 중반부터는 밀교를 순밀이라고 한다.

- 700년경 <대일경> 형성, 밀교의 번성

 

3) 쉬운 불교에 대한 요구와 인도불교의 변화

(1) 밀교는 대승불교를 바탕으로 성립한 불교이다.

* 밀교의 중심 붓다는 대승불교의 <화엄경>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비로자나불이다.

* 밀교는 대승불교가 발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대승불교를 바탕으로 성립한 불교이다.

 

(2) 밀교가 인도불교에서 세력을 확장한 이유

a) 쉬운 불교에 대한 요구

- 대승불교는 600년대에 이르면 부파불교를 능가하는 어려운 불교가 되고 만다.

b) 인도불교를 후원하는 계층인 상업 집단이 몰락하면서 힌두교를 지원하는 농업 집단의 구미에 맞는, 주술적이고 제의적인 요소가 강조되는 모습으로 변화하였다.

 

4) 밀교의 번성과 무너지는 불교

(1) 밀교의 특징

* 밀교 교리의 가장 큰 특징은, 관정이라는 의식을 통해서 제자가 스승에게 이미 붓다임을 고지 받고 출발한다는 점이다.

 

(2) 밀교는 수행에 있어서도 진언이나 제의적인 형식 위주의 방법이 강조되는데, 이것은 농경문화의 주술 전통에 부합하는 간편함을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만다라(mandala)

* 정신적인 수행과 관련해서 붓다와 붓다의 세계와 배치를 관상할 때 사용되는 도상

* <대일경>을 근거로 그린 태장계 만다라와 <금강정경>을 근거로 그린 금강계 만다라가 있다.

 

(4) 탄트라(tantra)

* 밀교에서 경전이나 수행법을 탄트라라고 한다.

* <대일경>의 행 탄트라, <금강정경>의 유가 탄트라-> 중후기 무상유가 탄트라가 유행/ <비밀집회탄트라>에서는 비로자나불보다도 동방 아촉불에 대한 숭배가 나타난다.

* 점차 성적인 에너지를 활용하는 비중이 증대하면서 체계화되는데, 이것을 좌도밀교나 금강송이라고 한다.

 

(5) 800년대에서 1200년까지 400여 년간 밀교는 불교의 본질과는 점차 멀어지고 인도불교는 힌두교의 재가주의보다도 못한 상황으로 침잠하게 된다.

 

 

30. 힌두교와 이슬람에 무너지는 불교

1) 힌두교화되는 불교와 안에서 무너지는 불교

* 700년경 부터 밀교의 번성- 불교가 힌두교화 되었다.

* 1203년 당시 최대의 사원이었던 비크라마시라가 이슬람 군대에 의해 파괴되는 사건을 인도불교의 최후로 본다.

* 밀교 시대에는 성적 금기가 무너졌고, 더 나아가 이것을 수행에 활용했다.

*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지게 된 것은 힌두교에 흡수되거나 이슬람의 공격에 의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붓다의 근본 정신을 망각하고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지 못하였던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하겠다.

 

2) 초거대 사찰이 초래한 비극의 그림자

* 불교에 대한 국가의 후원과 사원의 초거대화는 불교가 민중과 유리되는 폐쇄적인 구조를 만들어 냈다.

* 이슬람의 세력 확장 과정에서 1203년에 비크라마시라 사원이 파괴되고,이를 기점으로 인도불교가 최후를 맞이했다고 본다.

 

3) 이슬람이 되는 불교도들

* 카스트 제도에 속하지 않거나 사문 전통의 흐름에 위치한 사람들은 힌두교 대신 이슬람으로 전향

 

 

31. 티베트로의 이동과 새롭게 일어서는 불교

1) 중국의 영향을 받으며 시작된 티베트불교

* 641년 티베트 최초의 불교 사원 조캉 사원이 건립

- 티베트불교는 초기 100여 년 이상 중국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2) 인도불교의 약진과 중국불교와의 논쟁

(1) 760년 나란다 사원의 최고 고승이었던 산타라크시타가 티베트 방문하여 인도불교를 전파.

 

(2) 792-794년 삼예 논쟁에서 인도불교의 승리

* 산타라크시타의 제자인 카마라실라와 중국 선종의 선사인 마하연 간의 논쟁

* 중관, 유식의 입장과 중국 선종이 충돌하여 벌어진 논쟁

* 카마라실라가 승리함으로써 중국불교는 티베트불교에 대한 영향권을 상실하게 된다.

 

3) 밀교의 티베트 장악

(1) 파트마삼바바

* 티베트불교를 인도불교적인 성향으로 바꾼 것은 산타라크시타지만, 실질적으로 티베트불교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8세기 밀교 금강승이었던 파트마삼바바이다.

- <티베트 사자의 서>의 찬술자로, 본교를 누르고 티베트불교를 확립한다.

 

(2) 11세기 금강승의 분파인 시륜승 아티샤도 티베트불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1042년 비크라마시라 사원의 최고 고승 아티샤, 티베트를 방문

 

(3) 8세기 파트마삼바바의 금강승과 11세기 아티샤의 시륜승이 전해지면서 티베트불교는 밀교의 영향이 강해진 모습을 보이게 된다.

- 다수의 인도 승려들이 티베트로 갔다.

 

4) 신불교의 시작

* 1203년을 기점으로 인도불교는 긴 공백기를 가지게 된다.

* 인도의 불교 부흥과 관련해서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암베드카르의 신불교 운동이었다.

- 1955년 서인도의 봄베이에서 인도불교협회를 조직하고, 신불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 1956년 나그푸르에서 수십만 명이 동시에 불교에 귀의

 

 

 

 

<< 중국 불교 >>

 

< 1장 중국으로 들어오는 불교 >

초전기의 불교

 

32. 실크로드 개척과 함께 시작된 불교의 전파

1) 실크로드를 개척한 장건

* 불교의 중국으로의 전파는 실크로드가 개척된 이후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 장건이 실크로드를 개척했다(기원전 139)

 

2) 실크로드와 오아시스 국가가 불교에 남긴 흔적

* 불교의 중국 전파는 오아시스로를 따라서 이루어진다.

- 세 개의 오아시스로 중 불교의 전파 및 중앙아시아불교와 관련해서 중요한 길은 천산남로와 서역남로이다.

 

cf) 실크로드가 개척되기 전 인도불교는 대외 교역로를 따라 서쪽으로 전파되었었다.

 

 

33. 중앙아시아로의 불교 전래

1) 실크로드 서역남로의 호탄

* 서역남로의 호탄은 인도 문화의 영향을 받은 불교 국가 였다.

- 인도신화에 나오는 사천왕 중 하나이자 북방을 관장하는 비사문천왕을 숭배

- 아소카 왕의 아들인 쿠날리가 건국했다는 전설이 있다.

- 호탄에는 몽구스를 숭배하는 유풍이 있었다.

 

2) 바미얀과 실크로드 천산남로의 키질, 그리고 돈황

* 바미얀, 키질, 돈황의 석굴군

- 바미얀(아프가니스탄에 위치)/ 키질(천산남로의 중간에 위치)/ 돈황(중극으로 가는 관문)

 

cf) 가피

- 부처나 보살이 자비심으로 중생에게 힘을 줌.

 

 

34. 중국으로의 불교 전래

1) 불교 전래에 대한 최초의 기록

 

2) 후한 명제의 감몽구법설

* 감몽구법설은 67년 후한의 명제가 금인(부처)을 꿈에 보고 구법의 사절을 보냈다는 이야기

 

3) <주서이기>, 중국불교가 만든 허구와 실재

(1) <주서이기>에 따르면, 붓다는 주나라 소왕 24년인 기원전 103048일 탄생하여, 주나라 목왕 52년인 기원전 949215일에 입멸하였다고 한다.

 

(2) <주서이기>의 허구적 내용이 나타나게 두 가지 이유

a) 불교와 중국이 관련된 역사가 오래이며,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할 수밖에 없었다는 당위성을 변증하기 위함이다.

b) 중국의 상고주의, 즉 역사가 오래된 것을 귀하게 여기고 좋아하는 문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35. 중국 최초의 사찰 백마사와 <사십이장경>

1) 중국 최초의 사찰 백마사

* 후한 명제 때 중국 최초의 사찰 백마사가 창건? 되었다.

- 67년 인도 승려 가섭마등, 축법란이 낙양에 도착하여 백마사를 창건?

 

2) <사십이장경>의 문제와 불교의 확대

* 가섭마등과 축법란이 중국에 전한 최초의 경전은 <사십이장경>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인도에서 전래된 경전이 아니라 후일 중국불교에서 재편집 된 거라 한다.

 

3) 비법분경, 불교와 중국 전통의 충돌

* 불교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필연적으로 중국의 전통 종교였던 도교와의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 비법분경

 

 

36. 외국인 승려의 입국과 경전의 번역

1) 중국 초기 승려들에 대한 중국 특유의 정리 방식

* 중국에서는 전도승의 이름에 그 승려의 출신 지역을 성으로 붙이는 아주 특이한 방식을 사용하여 그 출신지를 구분하였다.

- 안식국 출신(안세고)/ 월지국 출신(지루가참)/ 강거국 출신(강맹상, 강승회)/ 인도 출신(축법란, 축삭불, 불도징)

 

2) 중국 최초의 역경승 안세고

* 중국불교에서 가장 먼저 경전을 번역한 승려는 안세고이다.

- 안식국 왕자 출신/ 30여 세의 나이로 147년 낙양에 도착

- 소승경전(수행법)을 번역

 

3) 지루가참의 대승경전 번역

* 지루가참은 160년경 낙양에 도착

* 대승경전(수행법)을 번역

* 지루가참이 소개한 대승 수행법은 이후 천태 지의의 지관법을 거쳐 마침내 가장 중국적인 불교라는 이름을 듣는 선불교로 맺어진다.

 

 

37. 유목민의 중국 정복과 불교의 확대

1) 삼국의 혼란기에 확대되는 불교

* 삼국의 혼란기에 불교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 이 시기 불교의 약진은 반야 사상을 통해서 확인된다.

- 남인도에서 시작된 반야 사상은 현실을 허상으로 보고 그 이면에 존재하는 실재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 피안이라는 이상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다.

 

2) 유목민 세력의 성장과 불교의 번성

* 삼국시대가 되면 이미 만리장성 밖의 유목지대는 불교를 신앙하는 불교적인 세계가 된다. 이 만리장성이 무너지는 시기가 바로 516국 시대이다.

* 516국은 중국 역사상 최초의 불교왕조다.

- 회수(화이허 강) 이북에 불교가 번성하게 된다.

 

3) 남조의 성립과 삼론종의 유행

(1) 회수 이남에 남조 성립과 삼론종의 유행

- 남조에는 불성 사상이 유행하고, 인도의 중관학파와 관련된 <중론> <백론> <십이문론>을 주요 경전으로 삼아 성립된 삼론종이 유행하게 된다.

 

(2) 불성 사상

- 모든 중생에게는 붓다가 될 수 있는 근본 성품인 불성이 갖춰져 있다는 것으로, 본질은 정당한데 문제는 현상에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3) 삼론종

- 현상의 문제와 본질에 대한 귀납적 추구

 

 

 

 

< 2장 중국을 정복하는 불교 >

위진남북조의 불교

 

38. 인도적인 도안과 중국적인 구마라집

1) 경전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2) 격의불교를 반대한 도안

(1) 도안(312-385)은 북방불교의 교단을 정비하고 불교의 안정을 꾀하는 데 주력했던 인물이다.

* 도안은 모든 승려의 성을 으로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

* 중국으로 전해져 번역된 경전의 목록을 편찬- <종리중경목록>

 

(2) 도안은 번역과 관련해서 격의불교를 반대했다.

- 격의불교란 열반무위로 또 진여를 본무로 번역하는 것으로, 중국인들이 이미 알고 있던 도가의 용어를 차용하여 불교를 이해하도록 하는 방법이다.

 

(3) 도안은 중국불교 최초로 빈두로존자 신앙의 유포자이기도 한데, 이는 오늘날 한국불교에도 전해지는 나반존자신앙과도 연관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3) 구마라집을 얻기 위해 두 나라가 멸망하다

* 구마라집(344-413)은 위진남북조 시대를 대표하는 구자국(쿠차)의 승려

* 구마라집을 얻기 위해 두 나라(구자국, 후진)가 멸망한다.

 

4) 번역의 체계를 확립한 구마라집

* 401년 구마라집은 후진의 장안으로 가게 된다

* 402-413년에 걸쳐 많은 경전을 번역하게 된다.

* 구마라집의 문하 제자로 특출난 인물 네 명

- 승조, 도생, 도융, 승예

 

 

39. 여산 혜원과 개인적인 강남불교

1) 중국 강남과 강북의 문화적인 차이

* 화북과 화남

- 회수를 중심으로 하는 황하 문명권의 화북/ 장강 문화권의 화남

* 강북과 강남

- 장강의 북쪽 강북/ 장강의 남쪽 강남

- 강북은 집단적이고 정치적/ 강남은 개인적이고 자유로움

 

2) 여산의 극락왕생 결사와 호계삼소

* 강남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도안의 제자인 혜원(334-416)이다.

* 혜원은 강남의 여산으로 들어가 은둔한다.

* 혜원은 중국 정토 신앙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 402년 동림사에서 극락왕생 결사를 단행

 

cf) 정토신앙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믿고 따름으로써 그의 나라인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염원하는 신앙이다.

 

3) 계율을 중시한 혜원과 불타발타라의 만남

* 인도의 승려 불타발타라는 411년 강남 혜원의 여산교단으로 가게 된다.

이후 남경 도량사에서 <화엄경><마하승기율> 등을 번역한다.

 

4) 승려는 군주에게 예를 표할 필요가 없다

* 혜원의 <사문불경왕자론>

- ‘출가한 승려는 왕에게 예를 표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담은 일종의 논술서

 

 

40. 황제와 붓다가 동일시되는 강북불교

1) 북위의 등장과 강북불교의 새로운 조짐

* 북위는 강북을 통일하는 기반을 마련하면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자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불교와 마찰을 빚게 된다.

* 강북의 불교는 강남과 같은 주체적인 교단 운영을 포기하고 정권에 예속되어 보호를 받는 안전한 길을 선택한다.

 

2) 태무제의 불교 말살과 중국불교의 교훈

(1) 북위 태무제의 폐불 사건

* 북위 제3대 군주 태무제는 444년 스스로를 도교 황제로 칭하면서 도교를 국교화한다.

* 태무제는 446년 폐불을 단행

 

(3) 삼무일조의 법난

- 네 차례의 폐불 사건

- 북위 태무제의 폐불/ 북주 무제의 폐불/ 당무종의 폐불/ 후주 세종의 폐불을 의미

 

3) 담요의 운강석굴 개착과 강북불교의 자세

* 태무제의 폐불 이후 제5대 문성제의 불교 지원은 강북의 불교 교단이 국가 구조에 편입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 담요는 운강에 제5대 문성제를 포함하는 북위의 다섯 황제들을 불상으로 재현하여 담요오굴을 만들었다.

- 담요오굴은 운강석굴로 이어진다.

- 이후 제7대 효문제의 용문석굴로 연결된다.

 

 

41. 경전 목록과 계통의 정리

1) 다양한 경전의 전래로 인한 혼란

* 교상판석(교판)

- 다양한 경전을 정리, 분류해서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

 

2) 위진남북조의 10종교판

* 수나라의 통일 이전의 교상판석 중 유력한 것으로 10종이 있다.

- 남삼북칠(강남의 3+ 강북의 7)

 

3) 천태 지의의 오시팔교와 <묘법연화경>

* 수나라 때 천태 지의는 오시팔교로 분류

* 천태 지의는 <묘법연화경>이라는 경전을 통해서 붓다의 일대 가르침을 일관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천태 지의의 교관에 따라 생기게 된 종파가 천태종이다.

 

4) 현수 법장의 오교십종과 <화엄경>

* 당나라 초기 화엄종의 개조인 두순의 오교 교판

* 당나라 현수 법장의 오교십종의 교판

* 현수 법장의 오교십종은 <화엄경>에 초점을 두고 있다.

 

 

42. 인도에 대한 동경과 구법 여행

1) 인도로 떠나는 동아시아의 승려들

* 인도로 떠나는 이유 두 가지

- 첫째, 경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부족한 원전 자료에 대한 갈망 때문

- 둘째, 붓다와 관련된 유적을 답사하려고

 

2) 중국 최초의 구법승, 주사행

* 중국불교의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구법승은 260년에 서역행을 감행한 주사행이다.

- 주사행은 호탄에서 <대품반야경>을 입수

 

3) 법현의 간절한 구법과 혜생

* 본격적인 인도 구법승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은 <고승법현전>의 저자 법현이다.

- 399년 법현은 인도행

* 법현 이후 기록에 남아 있는 구법승은 혜생 법력이다.

- 518년 인도행

 

4) 육지와 바다로 오간 현장과 의정

(1) 중국불교에서 가장 위대한 구법승은 단연 현장이다.

- 현장은 629년 중국을 출발해서 645년까지 총 16년간 110개국을 유력했다.

- 현장은 646<대당서역기>를 집필했다.

 

(2) 의정

- 671년 중국을 출발하여 695년 귀국

- 설일체유부의 율장을 주로 번역

 

 

 

 

< 3장 중국식으로 변모하는 불교 >

, 당의 불교

 

43. 세계제국의 성립과 발전하는 중국

1) 양 무제(재위 502-549)와 강남의 번영

* 강남문화의 가장 큰 번영은 양나라 때 이루어진다.

* 또한 양 무제는 위진남북조 시대 가장 불교적인 군주였기 때문에 이 시기의 불교 역시 크게 발전한다.

 

2) 강북의 분열과 통합

* 북주(서쪽에 위치)의 제3대 황제인 무제는 574년 폐불 조치를 단행

 

3) 세계제국으로 깨어나는 중국

* 수 문제

- 589년 수 문제가 진을 정복하면서 중국 통일

- 대운하 건설

- 최초로 과거제를 시행해서 중앙집권제를 강화하고 귀족들의 세력을 억누른다.

 

 

44. 수 문제와 중국적인 최초의 불교, 천태종

1) 수 문제의 불교 선택과 수 양제의 계승

* 수 문제는 새로운 통일제국에 걸맞은 지배 이데올로기로 불교를 선택한다.

 

2) 수 양제(재위 604-617)와 천태종의 발전

* 수나라 때 가장 두각을 나타내었던 종파는 중국의 불교 종파 중에서 가장 먼저 대두한 천태종이었다.

* 천태종을 창시한 인물은 천태 지의였지만 천태종이 창시되는 배경을 이루는 인물로 혜문과 혜사가 있다. 그래서 흔히 혜문과 혜사를 천태종의 초조와 제2조라 하고 지의를 제3조라고 한다.

 

3) 지의의 저술과 천태종의 핵심 전적

* 지의의 가르침을 책으로 편찬한 사람은 장안 관정이다.

* 장안 관정은 천태종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천태삼대부를 완성했다.

- 천태삼대부란 <묘법연화경현의> <묘법연화경문구> <마하지관>이다.

 

4) 천태종의 중요 교리에 담긴 의미

(1) 지의의 교설 중 중요한 것으로는 삼제원융, 일심삼관, 일념삼천이 있다.

a) 삼제원융

- , , 중 삼제가 하나로 융합되어 구별이 없음을 말한다.

 

b) 일심삼관

- 한 마음 속에 공, , 중 삼제가 모두 갖추어져 있음을 자각하는 수행론이다.

 

c) 일념삼천

- 작은 한 생각에 이 세계의 모든 가치가 내포되어 있다는 뜻

 

(2) 성구설

* 삼제원융과 일념삼천의 본질에 일체가 내포되어 있다는 지의의 관점은 이후 본성 속에 원래부터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는 성구설로 발전하게 된다.

- 성구설은 성악설에 가깝다.

- 성구설은 천태종 제8조인 담연에 의해서 구체적인 완성을 이루게 된다.

 

(3) 천태 사상의 특징은 모든 것이 상호 관계 속에 있다는 원융성에 있다.

 

 

45. 세계 최강국 당과 종남산의 불교

1) 수나라의 멸망과 세계제국 당나라의 건국

* 619년 수나라의 멸망

- 대운하의 건설/ 고구려 정벌/ 수 양제의 사치와 향락에 대한 탐닉

* 대운하는 수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는 한편, 후속 왕조인 당나라가 번영하게 된 밑거름이 된다.

 

2) 종남산에 움트는 새로운 불교의 기운

* 장안 남쪽 종남산은 다양한 불교 종파의 맹아가 움트는 곳이었다.

- 남산율종의 도선

- 당나라 측천무후 시대에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는 화엄종의 시작인 두순과 지엄, 그리고 법장의 화엄사, 지상사, 운화사

- 남북조 말에서 당나라 초기까지 번성했던 삼계교의 백천사

 

3) 도선의 남산율종과 승단 정비

(1) 625년 당나라 태조(고조가 맞는 듯) 이연의 도선불후

- 도교를 앞에 놓고 불교를 뒤에 세운다.

 

cf) 관롱집단

- 관중(현재의 섬서성, 산시성)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선비족 중심의 귀족 세력 집단.

 

(2) 이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도선은 <사분율>에 입각한 계율로 승단을 정비하고 남산율종을 수립한다.

 

(3) 645년 현장이 귀국한 이후 당 태종이 불교에 귀의하고, 현장의 주청으로 656년 제3대 황제인 당고종이 도교보다 불교의 지위를 더 위에 두게 되었다.

 

 

46. 중국 최고의 진정한 세계인, 현장

1) 현장의 위대한 발자취

* 현장은 629년부터 645년까지 만 16년에 걸쳐 110개국을 방문하고 28개국에 대한 내용을 전해 들었다.

* 646<대당서역기>를 완성

 

2) 귀국 후의 현장과 당 왕실의 존숭

* 현장은 당 태종과 당 고종의 후원하에 19년간 741,335권의 경전을 번역한다.

이를 구마라집으로 대표되는 구역에 대비해서 신역이라고 한다.

* 당 고종이 자은사를 건립한 후 자은사에 주석한다.

* 현장은 당나라로 돌아온 뒤에 <반야심경>을 널리 유포하였다.

 

3) 현장 유식학의 발달과 한계

* 현장은 미륵에서 시작된 유식학파의 사람이었다.

* 현장은 유식학에는 오성각별설이 있다.

- 인간마다 근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성불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제창한 학설이다.

* 현장의 유식학은 보편성과 평등을 앞세운 화엄종에 의해서 중국불교의 주류에서 밀려나게 된다.

 

 

47. 민중에게 다가서는 중국불교

1) 말법 시대와 신행의 삼계교

* 수나라의 중국 통일 이전에 강북에서 등장한 신행의 삼계교는 매우 특이할 만한 민중불교라고 할 수 있다.

- 신행은 550년부터 전쟁과 환란이 그치지 않는 대혼란의 말법시대라고 규정했다.

 

2) 삼계교의 민중적인 타당성과 몰락

* 삼계교는 자기희생을 통한 신앙 공동체와 같은 집단으로 전란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지만 수, 당 통일제국이 들어서면서 탄압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 결국 당 중기에 들어오면서 삼계교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3) 전란의 시기와 정토 사상의 타당성

* 정토 사상은 문제가 많은 현실을 넘어 이상 세계를 찾아가고자 하는 이상세계론이다.

* 정토종은 위진남북조 시대와 당나라 초기까지 계속 발전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당시 끊임없이 이어졌던 전란과 관련이 있다.

 

4) 중국 정토종의 흐름과 전개 양상

* 정토종의 시원을 이루는 인물은 여산 교단에서 결사를 이끈 혜원이다.

* 초조 담란(416~?)은 정토 신앙에 투신하여 일생을 바친다.

- 중국불교에서 아미타불만이 유일한 구원자라는 점을 강조하고, 이를 중심으로 극락에 가는 방법을 체계화한 인물은 담란이 처음이다.

* 당나라 때 도작(562-645)

- 청명염불 방식을 제시

* 당나라 때 선도(613-681)

- 담란과 도작을 계승해서 정토종을 집대성한 인물

 

 

48. 중국 유일의 여성 황제와 용문석굴

1)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 황제의 탄생

* 측천무후는 주나라(690-705/ 무주)를 개국해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2) 용문석굴에 새겨진 측천무후와 황제의 꿈

* 봉선사 노사나불(= 비로자나불)672년부터 675년까지 개착되는데, 후원자는 당시 고종의 황후였던 측천무후이다. 이와 관련해서 측천무후가 자신의 얼굴을 닮은 등신불을 모시고 황제가 되기를 발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3) 인도불교의 퇴조와 중국화된 불교의 약진

(1) 당 초기 현장에 의해 인도에서 전래된 유식학, 즉 자은종(법상종)이 중국불교계를 장악하였다.

 

(2) 그러나 당이 안정기에 접어 들면서 중국적인 불교가 약진하였다.

 

(3) 대표적인 중국불교의 종파 사가대승

a) 천태종

- 수나라 때 만들어지지만, 당의 안정기에 들어와 형계 담연에 의해 더욱 발전하게 된다.

b) 화엄종

- 측천무후 시기에 완성

c) 선종

- 가장 중국적인 불교/ 측천무후 시기에 확립

d) 정토종

- 뚜렷한 종파라고 하기에는 미진하다

 

 

49. 화엄 사상, 진정한 통합을 말하다

1) 세 가지의 <화엄경>

* 일반적으로 <화엄경>이라 하면 60<화엄경>80<화엄경>을 의미한다.

* 60권본은 강남의 동진에서 불타발타라가 418년에 번역한 것이다. 이를 진역본이라고 한다.

* 80권본은 측천무후 재위 시절인 695-699년 호탄 출신의 실차난다가 번역한 것으로, 당역본이라고 한다.

* 화엄종은 60권본을 바탕으로 성립되고 이후 80권본이 번역된 후 발전하였다.

 

2) 모두의, 모두를 위한 화엄 사상

* 화엄 사상의 다원적이고 원형적인 구조는 승자나 패자도 소외됨 없이 모두가 평등하고 조화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 모든 존재가 그 자체로 비교 대상이 없는 특수한 나로서의 완결성을 확보한다는 뜻이다.

* 화엄종은 측천무후 시대에 완성되어 계속해서 지배 세력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며 동아시아 불교 교종의 최고 위치를 유지하게 된다.

 

3) 화엄종의 확립과 전개

(1) 초조 두순(557-640)

* 화엄종의 초조는 장안과 종남산 일대에서 활약하면서, 문수보살의 화신이라고 평가받은 두순이다.

* 두순은 화엄종의 세계관을 정립하였다.

 

(2) 2조 지엄(602-668)

* 두순의 제자/ 지상대사, 운화존자

* 화엄종이 성립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3) 3조 법장(643-712)

* 화엄종의 실질적인 완성자

 

(4) 4조 징관(738-838)

* 청량법사, 승통청량국사

 

(5) 5조 종밀(780-841)

* 종밀은 선과 화엄이 다르지 않다는 선교일치를 주장

 

 

50. 달마의 중국 도착과 선에 대한 갈망

1) 달마(?-535)의 불투명성과 설화의 옷을 입은 달마

* 선종은 중국에서 재구성된 천태종과 화엄종보다 더 중국적인 성향을 가진 불교이다. 그런데 그 시원을 보리달마라는 인도 승려에게 두고 있다.

* 보리달마는 북위와 숭산 지역에서 활동을 했고 혜가에게 가르침을 주고 <능가경>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2) 달마에게 <능가경>을 전수받은 혜가(487-593)

* 선종의 제2조는 혜가이다.

* 40세에 출가한 혜가는 후에 달마의 제자가 되어 4-6년 정도를 일승, 즉 통합적인 대승의 관점을 배우게 된다.

* 이후 <이입사행론><능가경>을 전수 받는다.

 

3) 선종의 계보와 홍인의 동산법문

(1) 초조 달마-> 2조 혜가-> 3조 승찬(?-606): 초조부터 제3조까지는 숭산에서 주로 활동

 

(3) 4조 도신

- 선종의 무대가 숭산에서 쌍봉산의 서쪽 봉우리(서산, 사조산)으로 옮겨진다.

 

(4) 5조 홍인(601-674)

- 쌍봉산의 동쪽 봉우리(동산, 오조산)에서 활동

- 홍인의 가르침을 동산법문이라고 한다.

- 홍인은 <능가경>을 버리고 반야 사상의 경전인 <금강경>을 취한다.

 

4) <금강경>으로 인도되는 혜능(638-713)과 홍인의 제자들

* 홍인의 10대 제자에는 신수, 현색, 혜능, 법여, 지선, 혜안 등이 있다.

* 이중 신수가 홍인의 대표적인 제자였으나 신수와 혜능이 입적한 후 낙양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신회(혜능의 제자)가 혜능선양운동을 추진함으로써 뒤바뀌게 된다.

 

 

51. 경제적 안정과 남방문화의 역습

1) 제도의 안정 뒤에 나타나는 개인적 요구

* 당나라의 경제적인 풍요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은 집단주의적인 관점을 탈피해서 개인화되었다.

- 중국불교는 화엄종에서 점차 선종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초기에 해당하는 인물이 바로 홍인이다. 또 강남의 약진과 더불어 강남의 개인주의적인 문화가 대두되는데 이를 대변하는 초기 인물이 바로 혜능이다.

 

2) 혜능의 사상적 관점과 신수의 위치

(1) 혜능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불성, 즉 붓다가 될 수 있는 본질에 입각해서 견()성할 것을 주장한다.

- ‘자기의 마음만 밝히면 모든 사람이 붓다가 될 수 있다

 

(2) 혜능 당대에는 신수의 세력이 우세했다.

* 신수는 수도에서 활동했으나, 혜능은 강남 변방의 광동성에서 활동했다.

 

3) 이길 수밖에 없는 카드를 가진 혜능

(1) 남돈북점- 혜능의 돈오, 신수의 점오

* 점오란 깨달음은 점차적으로 익혀 가다가 어느 한순간에 질적인 변화를 동반한다는 판단이다.

* 돈오란 우리가 감은 눈을 뜨는 것처럼 깨달음은 순간적이라는 관점이다.

 

(2) 혜능의 주장은 보다 종교적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동시에 더욱 보편적이면서 간결하다. 또한 중국 전통의 인간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인 성선설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혜능 당대는 아니었지만 신수계가 몰락하고 혜능계가 주류가 될 수밖에 없었다.

 

 

52. 밀교의 발전과 사상의 정체

1) 당나라의 번영이 초래한 밀교의 발달

* 당의 안정과 번성에 따른 개인화의 요구는 선종의 발전과 더불어 밀교의 발전을 가져왔다.

* 중국에 밀교가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선무외가 중국으로 오는 716년부터라고 하겠다.

* 선종이 개인화된 사람들의 자기추구를 반영하고 있다면, 밀교는 주술적인 측면을 통한 개인의 자기구현을 나타낸다.

* 밀교는 귀족들에게 성행.

 

2) 선무외의 <대일경>과 태장계 만다라

* 밀교의 번성을 주도한 이들은 개원삼대사라고 한다.

- 당 현존 시대 716년 선무외, 719년 금강지, 720년 불공금강이 차례로 중국에 입국해서 중국밀교를 정립하였다.

* 선무외는 724년 태장계 밀교의 중심 경전이 되는 <대일경>을 번역했다.

* 태장계 만다라가 있다.

 

3) 금강지의 <금강정경>과 금강계 만다라

* 금강지는 723년 금강계 밀교의 중요 경전인 <금강정경>을 번역한다.

* 금강계 만다라가 있다.

 

4) 불공금강의 밀교 완성과 혜초

* 불공금강은 금강지의 제자로 밀교 경전을 대규모로 번역했다.

- 중국 밀교의 완성

* 불공금강의 제자

- 함광, 혜초, 혜과, 혜낭, 원교, 각초 등

* 이 중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신라승이며, 혜과의 제자인 공해는 일본 승려로 일본 진언종의 시조가 되는 인물이다.

 

 

53. 안사의 난, 남종선을 꽃피게 하다

1) 남종선의 수도권 진출과 신회의 야망

* 신수의 입적 이후 황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신회가 강남에서 수도권인 낙양으로 진출하면서 신수계와 혜능계가 충돌하는 양상이 만들어진다. 이로 인하여 남돈북점과 혜능 6조설이 점차 힘을 얻게 되며, 또 달마 이래의 가르침 전수라는 법통 역시 분명해지게 된다.

 

2) 안사의 난으로 꺽이게 되는 당나라

* 755년 안사의 난 발발

-> 전란을 수습하기 위해서 현종은 상황으로 물러나고 셋째 아들인 제7대 숙종에게 양위한다.

 

3) 장안과 낙양의 파괴와 신회의 약진

* 당나라는 안사의 난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군자금이 부족하자 승려의 신분증인 도첩을 판매

- 신회는 조정의 정책에 적극 협조

- 신회는 낙양의 하택사에 주석

- 신회는 하택사를 중심으로 북종선을 비판하고 남종선을 전파했는데, 이렇게 하여 성립된 신회의 종파를 하택종이라고 한다.

* 안사의 난으로 장안과 낙양에 근거지를 두었던 북종선이 타격을 입었고 신회의 비판과 황실과의 연결점이 생김으로 인해서 결국 혜능이 6, 신회가 7조가 된다.

 

4) 하택종의 몰락과 새로운 남종선의 전개

* 남종선이 점차 발전하면서 남종선 내에서 수행과 관련된 돈점 문제가 다시 제기된다.

* 결국 신회의 입적 이후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하택종은 몰락하고,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파가 주류가 된다.

 

 

54. 가장 중국적이지만 주류는 아닌 선종

1) 남종선의 분파와 황금기

* 안사의 난 과정에서 일어난 장안과 낙양의 피괴로 당시 중국불교의 주류였던 교종이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 안사의 난 이후 중국불교에서 남종선의 대약진이 전개된다.

* 당 중기 이후 남종선의 번영은 남종선 안에서의 자기분화를 만들어 내게 되는데, 이를 흔히 오가칠종이라고 한다.

= 위앙종, 임제종, 운문종, 조동종, 법안종+ 양기파, 황룡파

 

2) 남종선의 슬로건이 의미하는 것

* 남종선의 슬로건=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

* 교외별전 불립문자

- 붓다의 가름침의 핵심은 별도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며, 그러므로 문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 직지인심 견성성불

- 곧장 마음을 가리켜서 견성, 즉 불성을 보아서 성불한다는 의미이다.

 

3) 깨달음의 집중과 깨달음 속에 존재하는 현실

* 남종선의 돈오돈수설은 오직 깨달음만 존재할 뿐 어떤 수행도 존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55. 신유교의 맹아와 불교의 대응

1) 불교와 신유교 사상 교체

* 불교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번성하여 북송 시대(960-1127)까지 약 900년간 중국 사상계를 장악하며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이후 신유교가 발흥하면서 동아시아는 신유교가 주도하는 사회로 변모하고, 결국 불교는 사상계의 2선으로 물러나게 된다.

 

2) 통과의례가 없는 불교와 통과의례가 중요한 유교

* 불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세계종교임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통과의례(관혼상제와 같은 것)를 완성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3) 과거제의 발달과 함께 위축되는 불교

* 과거제의 교재는 유교의 오경이다.

* 과거제의 발달로 인해 불교는 위축되고 신유교는 부활하였다.

 

4) 유교의 본격적인 불교 비판 대두

* 당나라가 중후기로 넘어가면서 유교의 세력은 점차 확대되기 시작한다.

- 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논리 구조가 약한 남종선의 번성으로 인해, 유교를 상대할 수 있는 불교적인 측면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 결국 불교는 한유라는 최초의 불교 비판자를 만나게 된다.

 

 

56. 회창법난으로 표면화된 불교의 문제점

1) 치명적인 타격이 된 회창법난

* 842-846년 당나라 제16대 황제인 무종의 회창법난

- 중국 전 지역에 걸쳐 일어난 폐불 사건

-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불교는 쇠퇴한다.

 

2) 대탄압의 발생 원인과 결과

* 회창폐불은 종교적인 이유와 경제적인 이유, 두 가지에 의해서 단행된다.

- 도교를 신봉하던 무종을 도사 조귀진이 부추겨서

- 당나라 말기 비대해진 사원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서

 

3) 회창폐불이 가능했던 불교 내적인 이유

* 당나라 불교의 두 가지 문제점

- 첫째는 당시의 불교가 국가권력에 의지하여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 둘째는 민중과의 유리이다.

 

4) 독주체제를 완비하는 선종

(1) 회창폐불은 중국불교에 엄청난 타격을 주지만, 그럼에도 교종에 비해 선종의 충격은 덜했다.

* 교종이 도시사찰을 중심으로 경전에 입각한 공부를 한다면, 선종은 산사에서 선 수행을 중심으로 생활했다.

* 선종은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중심으로 수행한다.

 

(2) 회창폐불 이후 선종이 독주하게 되나 결국 유교의 반발을 가속화 시키고, 마침내 북송 시대 신유학의 발흥으로 연결된다.

 

 

 

 

< 4장 무너지는 불교와 중국 >

, , , 청의 불교

 

57. 관료제 사회의 만개와 제도화되는 선종

1) 오대십국의 변화와 송나라의 등장

* 907~979년 오대십국 시대

- 907년 주전충의 후량에 의해 당이 멸망

- 오대십국이란 강북에서 차례대로 이어진 다섯 왕조와 강남 등 변방에서 동시에 일어났던 열 개 왕조를 의미한다.

 

2) 955-958 후주 세종의 폐불과 독주체제를 갖춘 선종

* 회창폐불 이후 교종은 크게 발전하지 못하지만, 전란을 겪는 과정에서 중국불교이 종교적인 부분만은 상당히 회복된다.

* 그러나 후주 세종의 폐불(955-958)로 교종은 완전히 무너지고 선종만의 빈약한 독주로 전개된다.

 

3) 송나라의 문치주의와 대장경 간행

(1) 송나라 때 대장경 간행

* 971-983년 개보칙판 대장경의 완성

* 이후 송나라는 네 차례에 걸쳐 대장경을 간행한다.

 

(2) 요나라, 금나라의 대장경 간행

* 1031-1064년 요나라 대장경 간행

* 1148-1173년 금나라 대장경 간행

 

4) 사상계의 변화와 제도화되는 선종

(1) 북송 시대 신유학의 북송오자

* 북송오자란 북송 시대의 다섯 명의 선생이라는 뜻

- 주돈이, 소용, 장재, 정호, 정이

- 정호와 정이는 형제인데, 이들에게서 각각 신유학의 두 학파인 성리학과 심리학, 즉 주자학과 육왕학(양명학)이 시작된다.

 

(2) 북송 시대 선종은 특유의 유연성을 잃어버린 채 경직되고 있었다.

* 이 당시 선종은 선어록을 정리했다.

 

 

58. 남송 시대와 한족의 불교에 대한 비판

1) 문약한 송나라와 남송의 성립

* 1127년 정강의 변으로 북송 멸망

* 이때 흠종의 동생이자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인 강왕 조구가 강남으로 남하하여, 지금의 항주인 임안에 왕조를 수립하니 이것이 바로 남송이다.

 

2) 민족감정이 부른 불교에 대한 비판

* 남송에서 외래문화인 불교에 대한 비판이 대두

- 즉 불교가 들어와서 중국이 약해지고, 출세간에 정신을 팔다가 야만적인 오랑캐들에게 수모를 당하게 되었다는 것

* 이러한 과정에서 신유학이 등장

 

3) 성리학의 완성과 육왕학의 성립

(1) 남송의 주희가 성리학(주자학)을 완성하였다.

* 주희는 불교의 교종(화엄 사상)에 영향을 받았고, 선종을 강하게 비판했다.

* 주희는 사서에 모두 주석을 남겼다- 사서집주

* 사서는 주희 사후 원나라 시대인 1313년 과거 시험 교재로 채택되면서 주희의 주석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게 된다.

 

cf) 사서 오경

* 사서- 논어, 맹자, 대학, 중용

* 오경- 역경, 서경, 시경, 예기, 춘추

 

(2) 남송의 육구연은 육왕학을 확립한다.

* 명나라 때 왕수인이 완성

- 육왕학= 양명학= 심리학

* 육왕학은 선종의 영향을 받았다.

- 육왕학은 선종과 마찬가지로 본래 마음의 체득을 학문의 목적으로 한다.

 

4) 변화를 거부한 불교와 굳어 버린 불교

* 성리학이 완성되고 육왕학이 확립되는 등 남송 시대 신유학은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불교는 변화를 거부하고 몰락하게 된다.

 

 

59. 세계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과 티베트불교

1) 몽골의 원제국의 성립과 중국 통일

* 5대 칸 쿠빌라이는 1271년 나라 이름을 원으로 정하고, 1279년 남송을 정복하여 중국을 통일한다.

 

2) 신도교의 강세와 쿠빌라이 칸에 의한 반전

* 칭기즈 칸은 신도교의 유파인 전진교에 우호적이었다.

* 그러나 칭기즈 칸이 사망하고, 불교에 관심이 있던 쿠빌라이가 칸이 되는 1260년 상황은 반전되어 티베트불교가 원나라의 국교가 된다.

 

cf) 도교

a) 도교는 사천성에서 시작된 민속신앙이며, 중국의 전통 종교다.

* 도교는 후한 말기에 장각의 태평도와 장릉의 오두미도를 통해 종교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 이후 태평도가 황건적의 난으로 인해 몰락하고 오두미도가 천사도라는 이름으로 유전하는 등 도교는 중국에서 그 명맥을 이어갔다.

* 천사도를 개량한 것이 북위 태무제 때 일어난 폐불과 관련이 있는 도사 구겸지의 신천사도이다.

* 그후 남송이 성립되는 시기에 이르면 신도교라고 불리는 수련도교가 출현하게 된다.

 

b) 종교 의식이나 부적과 같은 방식을 활용하는 것이 도교라면, 신도교는 호흡법을 통해서 기를 운신하는 수련도교라고 한다.

 

 

3) 티베트불교의 중국 점령과 외형적인 성장

* 티베트불교는 인도의 밀교와 티베트의 전통적인 무속신앙인 본(Bon)교가 습합된 대단히 주술적인 종교이다.

* 1260년 쿠빌라이는 사캬파의 파스파를 제사로 모시고, 티베트불교를 원나라의 국교로 삼는다.

 

4) 티베트불교의 문제점과 중국불교의 몰락

* 원나라의 적극적인 티베트불교 비호는 동시에 티베트불교가 타락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 원나라 시대 중국과 동아시아불교는 티베트불교에 의해서 외형적으로는 큰 성장을 보이게 되지만, 종교적으로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 성과 관련된 타락상에 대한 반발로 1409년 쫑카파는 계율의 준수를 강조하며 개혁운동을 벌이는데, 그 결과 황모파(겔룩파)가 만들어진다. 대대로 이 황모파 안에서 달라이라마가 나오며,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도 유디되고 있다.

 

 

60. 거대제국 속 또 다른 세계인의 등장

1) 인도에서 시작해 21개국을 유력한 지공

* 인도불교의 마지막에는 지공(1300-1361)이 있다.

 

2) 인도불교의 마지막과 고려의 금강산

* 1300년 마가다국의 왕자로 탄생

* 시계방향으로 인도를 유력

- 이 과정에서 후기밀교와 힌두교 탄트리즘과 같은 성적인 성향이 강한 종교와 충돌

* 티베트에서 계율 문제로 티베트불교 및 본교와 충돌

* 이후 원나라로 들어와 강남지역을 교화하고, 1324년 대도에 도착

* 1326년부터 1328년까지 고려에 머물며 티베트불교의 영향으로 문란해진 고려불교의 계율 정신을 바로 세우고, 인도의 선불교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가르침을 전했다.

 

3) 티베트불교에 의해서 무너지는 중국불교

 

 

61. 중국의 일부가 된 불교

1) 홍건적의 난과 승려 출신의 주원장

* 원나라 몰락기에는 몽골인의 고압적인 지배방식에 대한 불만과 티베트불교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다.

* 1351년 홍건적의 난 발발

- 홍건적이라는 이름은 관세음보살을 통한 극락정토를 염원하는 백련교와 미륵불의 하생을 통해서 새로운 이상 세계가 구현되기를 희망하는 미륵교도들이 머리에 붉은 띠를 두르고 반란에 참여한 데서 유래한다.

* 1355년 주원장은 홍건적 세력을 장악

* 1368년 주원장, 남경을 수도로 명나라 건국

 

2) 주원장의 불교 옹호

* 주원장은 불교에 호의적/ 티베트불교에 대해서는 비판적

 

3) 색깔을 잃고 통합하려는 불교

* 명나라 때의 중국불교는 정토종과 임제종이 그나마 활발한 모습을 보일 뿐 주체적으로 이렇다 할 발전이 없었다.

* 명나라 말기 4대 고승(운서 주굉, 자백 진가, 감산 덕청, 우익 지욱)은 유불도 삼교의 합일을 추구했다.

 

4) 명말 4대 고승의 업적

(1) 운서 주굉

* 주굉은 정토신앙을 중심으로 선종을 결합하여 선정일치를 주장했으며, 도교적인 요소를 수용하여 교화하기도 하였다.

 

(2) 자백 진가

* 불교를 중심으로 유가와 도가 등을 아우르려고 했다.

 

(3) 감산 덕청

* 덕청은 선의 가르침과 정토가 다르지 않음을 주장하며, 선 사상의 일치를 역설하고 삼교가 하나로 돌아갈 뿐임을 강조했다.

 

(4) 우익 지욱

* 정초를 중심으로 모든 종파를 아우르는 원융한 견해를 제시했다.

 

 

62. 유교의 옷을 입은 불교

1) 왕수인의 마음주의와 양명학

* 성리학은 남송 말기부터 사상계의 주류로 부각하기 시작하여 점차 정치적인 이념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는 원나라 시대에 다소 주춤하지만, 대체로 명나라 초기까지 유지된다. 그러다가 명나라 중기에 왕수인이 등장하면서 신유교의 사상계는 새롭게 변모한다.

* 왕수인의 양명학(= 심리학, 육왕학)

- 왕수인은 치양지, 즉 최초의 본마음으로 돌아갈 것과 앎과 실천은 하나라는 지행합일을 강조한다.

- 이후 중국 유교는 성리학보다도 양명학이 주류가 된다.

 

2) 중국불교가 성리학에 끼친 영향

* 성리학은 화엄 사상의 이사의 논리를 차용해서 이기론을 만들어 낸다. <대승기신론>의 일심이문을 차용해서 이원론적 심성론의 체계를 구축한다.

* 화엄종과 선종에서는 마음과 본성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한 용어로 사용하나, 성리학에서는 마음은 미진한 것이며, 본성이 핵심임을 강조한다.

 

3) 양명학의 옷을 입은 선종

* 불교의 영향을 받았지만 변별점이 존재하는 성리학과는 달리 양명학에서는 화엄종이나 선종과 마찬가지로 마음과 본성을 하나로 본다.

* 또 왕수인이 말하는 지행합일과 사상마연의 행동주의는, 선종이 돈오돈수라고 결론을 낸 뒤에 평상심이 도라고 하여 전체작용, 즉 모든 것은 깨달음의 작용일 뿐이라고 주장한 것과 합치한다.

* 하지만 양명학은 현실을 긍정하는 세속주의를 전개한다는 점에서 불교의 출가주의와는 차이가 있다.

 

4) 이지에게서 보이는 선사의 기질

* 이지는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본마음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그것에 따를 것을 주장하는 동심설을 제창했다.

 

 

63. 출가하는 황제, 무너지는 중국

1) 이자성의 난으로 천하를 얻은 청나라

* 1630년대-1640년대 이자성의 난

* 1644년 이자성, 명 멸망시키고, 순 건국(1644-1645)

-> 1644청은 오삼계의 도움 받아, 이자성을 물리치고 베이징에 입성

 

2) 유교의 한계와 새로운 불교의 부재

= 양명학의 붕괴+ 정토종과 티베트불교의 약진

 

(1) 청나라에 들어서면서 양명학을 비롯한 신유학에 대한 비판이 강조되고, 실증적인 성향이 강한 고증학과 실학으로 사상계가 기울게 된다.

- 청나라 초의 사상계는 양명학의 황종희와 고증학과 실학의 고염무 그리고 유물론적 관점을 취한 기철학자 왕부지가 주도한다.

(2) 청나라 때가 되면, 중국 고유의 불교보다는 티베트불교가 다시금 발전하게 된다.

 

 

3) 순치제의 출가에 관한 미스터리

* 청 제3대 황제 순치제가 중국의 불교 문헌에는 1661년 출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4) 태평천국의 난과 중국의 몰락

* 1850-1864년 태평천국의 난

- 태평천국의 난은 기독교의 난

 

cf) 황건적의 난, 홍건적의 난, 백련교의 난, 태평천국의 난

1) 184년 황건적의 난- 도교의 난

후한 말 악정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농민들이 일으킨 대반란이다. 태평도의 창시자인 장각이 지도하였으며, 음양 오행에서 흙()의 덕을 나타내는 황색 두건을 머리에 두른 데에서 황건적이란 이름이 붙었다. 황건적의 난은 후한의 멸망을 불러왔다.

 

2) 1351-1368년 홍건적의 난- 불교의 난

원대에 몽골 족의 지배에 항거하여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이다. 홍건적이란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두른 데에서 붙은 이름으로, 홍두적 또는 홍적이라고도 한다. 이 반란은 이민족 왕조인 원나라를 쓰러뜨리고 한족 왕조인 명()나라를 성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난은 미륵 · 백련 양 교도들이 일으켰는데, 원래 이 양 교단은 별개로 발생하였다. 하지만 원나라 말기에 이 양 교단이 혼합되어 행동하였고, 그 뒤 백련교로 통합되었다.

 

3) 1796-1805년 백련교도의 난- 불교의 난

청나라 건륭제가 황위를 아들 가경제에게 물려준 1796년부터 1805년까지 10년에 걸쳐 이어진 대반란이다. 삼대의 봄으로 일컬어지며 1세기 넘게 번영하던 청나라의 최전성기인 강건성세의 종언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백련교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난이라 하여 백련교도의 난이라 한다.

 

4) 1850-1864년 태평천국의 난- 기독교의 난

청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대봉기이자 신정국가[2] 태평천국 건국 운동.

 

 

 

<< 한국 불교 >>

 

< 1장 불교의 유입과 삼국의 발전 >

삼국시대

 

64. 한반도로 전래된 불교

1) 한국불교사의 시작

(1)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

* 고구려 372(소수림왕 2): 전진의 강북불교가 육로로 전파

* 백제 384(침류왕 원년): 동진의 강남불교가 해로로 전파

* 신라 제19대 눌지왕(재위 417-458): 고구려로부터 전파

 

(2) 삼국의 불교 전래 기록은 중국을 거친 한국불교라는 인식을 만들어 냈다.

 

2) 가야로의 불교 전래와 남방 기원설

* 48년 인도 아유타국(아요디아)의 공주 허황옥이 해로를 통해 가야로 들어와 금관가야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왕비가 되었고, 이 과정에서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설.

 

3) 고구려로의 또 다른 불교 전래, 북방 전래설

* 고구려의 성왕이 요동성에서 <요동성 육왕탑>을 보고 신앙심이 생겨 7층 목탑을 세웠다는 설

- 고구려 불교는 중국을 거치지 않고 중앙아시아로부터 직접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주장

 

 

65. 불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고구려와 백제

1) 외교 통로를 통해 불교를 공인한 고구려

* 삼국사기의 기록

- 372년 전진의 승려 순도가 고구려에 불교를 전함

 

2) 불교를 통한 강국으로의 비상

* 17대 소수림왕(재위 371-384)은 고구려를 안정과 번영을 위하여 전진으로부터 불교를 받아 들였다.

- 불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발전된 문화의 대규모 전래를 의미

* 18대 고국원왕(재위 384-391)

-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고 교서를 내린다.

* 19대 광개토대왕(재위 391-412)

- 불교 진흥책

 

3) 불교를 이용해 고구려를 견제한 백제

* 삼국사기의 기록

- 384년 동진의 승려 마라난타가 백제에 불교를 전함

- 침류왕(재위 384-385)이 마라난타를 모셔 극진히 예를 표한 것은, 적국인 고구려를 견제하고 불교를 통해서 백제의 발전을 꾀한 것이다.

 

4) 불교를 통한 국력 경쟁

*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불교를 통해서 국력을 신장시키는 경쟁을 하고 있었다

- 385년 한산에 사찰을 창건

- 392년 제17대 아신왕(재위 392-405)불교를 믿고 복을 구하라는 교서를 내린다.

 

 

66.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를 수용한 신라

1) 중국과의 교류가 막힌 신라

* 신라는 가야와 백제의 해상 세력에 막혀 중국과의 교류가 상당히 어려웠다.

* 신라는 민족적으로 중앙아시아 유목민인 스키타이나 흉노족과 관련이 있어서 산천 숭배나 샤머니즘 같은 전통 신앙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2) 신라불교의 시원을 연 묵화자와 아도

* 신라 제19대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에서 묵호자가 일선군(현 구미시)에 와서 모례의 집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 그러나 전통 신앙의 위력에 밀려 불교가 전파 되지는 못한 것 같다.

* 신라의 불교 공인은 527(528)년 이차돈의 순교를 기점으로 한다.

 

3) 불교와 전통 신앙의 충돌

* 21대 소지왕(재위 479-500) 때에 고구려에서 아도가 와서 모례의 집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 488년 소지왕이 까마귀를 따라가다가 남산의 피리촌 연못에서 사금갑, 거문고 갑을 쏘라는 글을 발견하고 거문고 갑을 활로 쏘니, 내전의 승려와 공주가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 <사금갑>은 왕위 쟁탈전과 관련되어 있던 전통 신앙과 불교 중 전통 신앙이 승리하고 불교가 밀려 났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4)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 공인

* 527년 제23대 법흥왕(재위 514-540) 때 이차돈 순교를 기점으로 불교 공인

- 이차돈은 천경림에 흥륜사 창건(527-544)을 주도하다가 순교

-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진 금강산에 자추사가 창건됨.

 

 

67. 불교를 통해 고대 국가의 초석을 확립하다

1) 고대 국가의 초석을 확립한 법흥왕

* 법흥왕 내외의 출가는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527년 이전에 불교가 이미 왕가에 두루 알려져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2) 흥륜사의 창건에서 확인되는 전통 신앙과의 갈등

* 544년 진흥왕(재위 540-576) 때 전통 신앙의 성지인 천경림에 흥륜사 완공

- 전통 신앙이 불교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의미

 

3) 전륜성왕이 되기를 꿈꾼 진흥왕

* 553~569년 전륜성왕을 꿈꾸었던 진흥왕이 황룡사를 창건

- 새로운 왕궁을 건설하는 과정에 상서로운 황룡을 보고 왕궁 대신에 사찰을 지었다.

* 574년 황룡사에 석가모니의 장육존상을 모신다.

 

 

68. 정반왕과 마야 부인이 다스리는 나라

1) 왕가와 전통 신앙에 미친 불교의 영향력

(1) 석가진종설

= 신라 왕족이 석가모니의 씨족이라는 사상

* 26대 진평왕(재위 579-632) 부부의 이름은 석가모니의 부모의 이름과 같다.

* 신라 왕족은 석가모니와 같은 인도의 크샤트리아 계급이라고 주장.

 

(2) 진평왕의 오랜 재위 기간에 성골이라는 신분제가 특화되었다.

- 이후 성별보다는 혈통이 우선 요소로 작용하면서 여성 군주가 등장하게 된다.

 

(3) 진평왕 대에 전통 신앙인 하늘 숭배 역시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 이 시기에 우리 전통 신앙 속 하느님이 불교의 제석천과 동일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2) 불교에 대한 간절한 열망의 시대

(1) 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세 가지 예지력에 대한 이야기

a) 당 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모란꽃의 그림과 씨앗을 보내자 그 대응으로 황룡사 남쪽에 분황사를 창건하고, 그 안에 9층으로 된 벽돌 석탑(모전 석탑)을 건축.

b) 선덕여왕이 영묘사 앞 연못의 개구리들이 한겨울에 깨어나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백제군의 침략을 예측해 대비했다는 것.

c) 선덕여왕이 죽기 전에 자신의 죽음을 예언하고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는 것.

- 선덕여왕은 낭산을 도리천이라고 지목.

 

(2) 23대 법흥왕에서 제27대 선덕여왕까지 신라는 불교로 살고 불교로 죽어서 재탄생하는, 불교에 대한 간절한 열망의 시대였다.

 

 

69. 미륵 신앙을 바탕으로 백제 부흥을 열망하다

1) 백제 부흥의 노력

* 21대 개로왕, 22대 문주왕, 23대 삼근왕 때까지 혼란기

* 24대 동성왕에 의해 나라가 안정을 되찾고, 25대 무령왕이 등극하면서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다.

* 이와 같은 상황에서 백제 중흥의 열망을 한몸에 받은 군주가 바로 제26대 성왕(재위 523-554)이다.

 

2) 새로운 백제 건설을 통한 국력의 강화

* 성왕은 526년 인도에서 귀국한 겸익을 후원하여 율장 관련 문헌을 번역하게 하였다.

* 538년 성왕은 수도를 사비로 옮긴 뒤 나라 이름을 남부여로 바꾸고, 이 해에 일본에 불교를 전했다.

* 542년 성왕은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열반경> 등의 불교 경전을 수입해 왔다.

* 545년 장육존상을 조성

* 552년 일본에 불교문화를 대대적으로 전파했다.

 

3) 전륜성왕 경쟁에서 패한 성왕

* 551년 나제 동맹을 통해 백제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였으나 553년 진흥왕의 배신으로 한강 유역의 지배권은 신라로 넘어가게 되었다= 나제 동맹의 결렬

*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전사

* 이후 백제는 제27대 위덕왕, 28대 혜왕, 29대 법왕을 거치는 동안 극심한 혼란기를 겪는다.

 

4) 백제의 마지막 전륜성왕을 꿈꾼 무왕

* 30대 무왕(재위 600-641)은 재위 기간 내내 신라 및 고구려와 전쟁을 치르는데 이 과정에서 강력한 백제의 위상을 회복하였고, 이와 동시에 불교 진흥을 통한 왕권 강화책의 일환으로 백제 최대의 국찰인 미륵사를 창건한다.

* 삼국의 통일기와 후삼국 시대에 미륵 신앙이 유행

* 그러나 무왕 사후 백제는 몰락하게 된다.

 

 

70. 화랑도에 결합된 미륵 신앙과 원광의 세속오계

1) 유목 문화와 선 문화가 융합된 화랑 제도

* 진흥왕 때인 576년 신라는 화랑 제도를 체계화한다.

* 최치원에 따르면 화랑도의 근원은 전통 신앙인 풍류도이며 유불도 삼교의 가치를 포함하는 동시에 변별점이 존재한다고 한다.

* 화랑도는 선(() 사상(발해만을 중심으로 전개된 고대의 신선과 연관된 산악 숭배 신앙)과 관련이 있다.

* 즉 화랑은 샤먼 문화와 관련이 있으면서 종합적인 문화 역량을 갖춘 전투 가능 인력이라고 하겠다.

 

2) 미륵 신앙을 통한 변혁의 시도

* 진지왕(재위 576-579) 때가 되면 화랑도는 불교의 미륵 신앙과 결합한다.

- , 종래 화랑과 결합되어 있던 선 사상이 불교의 미륵 신앙으로 점차 대체되는 것이다.

 

3) 원광의 세속오계에 나타나는 신라불교의 발전 방향

* 600년 원광, 남조의 진나라에서 귀국

* 608년 원광, 수나라에 군사를 동원해 주기를 청하는 <걸사표> 작성

* 600년대 초 원광, 세속오계를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주었다.

* 즉 신라가 국가 안에서 불교를 지향했다면, 백제는 불교 안에서의 국가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71. 신라불교의 토대를 완성한 자장

1) 재상의 길을 거부하고 출가를 택한 자장(594-599사이 출생, 653-655사이 입적)

* 원광에 의해 토대를 확립한 신라불교는 선덕여왕 때에 활약한 자장이 계율을 중심으로 교단을 정비하면서 보다 강력한 체계를 완성하게 된다.

 

2) 신라불교 최초의 율사

* 자장은 신라불교 최초의 율사인 동시에 문수 신앙의 전파자이고, 또한 불사리 신앙을 확립한 인물이다.

- 638년 당나라 종남산에서 남산율종의 개조인 도선 등과 교류

- 642년 당나라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

- 643년 신라로 귀국

 

3) 신라불교의 혁신과 왕권의 강화

* 자장, 황룡사 구층목탑(645-646) 건립 제안

* 647년 양질의 승려들을 배출하기 위해 불사리를 모셔 놓고 단체로 출가할 수 있도록 통도사를 창건

 

4) 선덕여왕의 죽음과 불사리 신앙의 정립

* 647년 비담과 염종의 난 과정 중 선덕여왕이 사망

* 647년 제28대 진덕여왕(재위 647-654)이 즉위

* 선덕여왕 사망 후 자장은 김춘추와 김유신 세력에 밀려 강원도 오대산, 강릉의 수다사, 강릉의 한송사지를 거쳐 태백산 석남원(현 정암사)에서 입적한다.

- 자장에 의해 불사리 신앙이 정립되었다.

 

 

72. 김춘추의 등장과 출렁이는 불교

1) 신라의 기류 변화에서 확인되는 유교

* 삼국사기는 성골 왕조였던 진덕여왕 때까지를 상대 신라, 김춘추의 진골 왕조부터를 중대 신라라고 지칭한다.

* 중대 신라부터 유교의 영향이 증대된다.

 

2) 유교를 통해 왕권 강화를 꾀한 김춘추

* 김춘추는 자장계로 대표되는 당시 불교계를 견제하기 위한 방법으로 유교에 대한 진흥을 꾀한 것이다.

* 당시 신라불교의 주류였던 자장계가 무너지는 신라불교의 변화와 공백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비주류였던 원효이다.

 

3) 신라불교와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자장

(1) 국가와 연계하여 불교를 확장한 자장의 시도가 낳은 두 가지 결과

a) 원효와 의상 같은 걸출한 고승이 나타나는 배경을 만들었다.

b)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기반을 확립했다.

- 자장은 불연국토설을 주장

- 이런 선민의식이 백성들을 통합하고 국가의 권위를 부여하는데 아주 유효했다.

 

(2)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든든한 뒷받침이 된 불교 국가의 기틀을 완성한 자장은 몰락한 뒤, 신라 하대에 이르면 화려하게 부활한다.

 

 

 

 

< 2장 화려하게 꽃피는 불교 >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

 

73. 신라불교의 아웃사이더들, 새로운 시대를 열다

1) 삼국의 사상적 통일을 위한 불교의 과제

*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

* 당시 신라불교는 자장계의 몰락으로 공백기

 

2) 세속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교화한 혜공과 혜숙

* 당시 불교계의 비주류로는 원효를 필두로 혜공, 혜숙, 사복, 대안과 같은 이들이 있다.

이들의 특징은 규정되지 않는 자유로움과 신이함을 지니며 민중과 함께 한다는 점이었다.

 

3) 현실 긍정의 해법을 제시한 사복과 대안

 

4) 새로운 시대를 향한 해법과 신라불교 10대 성인

(1) 당시 불교계 비주류의 특징 세 가지

a) 신이한 행적으로 사회를 풍자하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자 했다.

b) 죽음과 같은 비극적인 현실을 위로하고 극복하고자 했다.

c) 마주한 현실이 그 자체로 불교적인 이상 세계임을 말하고자 했다.

 

(2) 신라 10대 성인은 흥륜사 주불전 금당에 진흑 소상으로 모셔져 있었다.

- 불교의 시원에 관련된 상징적 인물 아도와 염촉을 제외하면 제도권 승려 네 사람(안함, 자장, 의상, 표훈)과 비제도권 네 사람(혜숙, 혜공, 사복, 원효)가 각각 배치되어 있는 셈이다.

 

 

74. 화쟁 사상으로 분열과 갈등을 해결하려 한 원효

1) 새로운 시대의 불교를 집대성한 원효(617-686)

* 원효는 육두품 출신

 

2) 해골 물로 재탄생한 마음의 철학

* 650, 661년 두 차례에 걸쳐 원효와 의상은 당나라 유학을 가려 했다.

* 6612차 유학 시도 때 원효는 해골 물 사건으로 유학 포기

- 원래는 무덤을 동굴로 알고 유숙한 후에 둘째 날 밤에 악몽에 시달렸다는 이야기

* 686년 원효가 혈사에서 입적

 

3) 대립과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화쟁 사상

* 일체는 마음에 달려 있고 그것은 완전한 것이니, 그곳에서 출가나 신분이라는 형식이 존재할 수 없다는 원효의 자각은 파계라는 파격적인 행동으로까지 연결된다.

* 화쟁사상

- 모든 논쟁을 화()로 바꾸는 불교 사상.

- 원효는 현실적인 대립과 충돌이 본질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두가 맞는 동시에 모두가 틀린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대립과 갈등을 조화롭게 할 수 있다는 원효의 화쟁 사상이다.

 

4) 신라불교의 위상을 세계에 떨친 원효

* 원효는 다양한 저술을 남겼으며 중국에까지 유명세를 떨쳤다.

 

 

75. 계몽을 통해 개혁을 실천한 의상

1) 당나라 유학과 화엄 사상의 완성

* 의상은 진골 출신

* 661-671년 의상의 당나라 유학

* 원효가 일체에 통하는 유심에 입각한 평등주의를 제창했다면, 의상은 본질의 관점에서 현상의 차이를 인정하는 관점을 취했다.

* 의상은 현장 문하에서 불교를 연구할 목적으로 당나라에 갔으나, 종남산 화엄종의 지엄에게 가서 수학했다.

 

2) 의상의 문자 만다라

* 의상은 지엄이 입적하던 해인 668<화엄일승법계도>라는 문자 만다라를 지어 스승에게 인정을 받았다.

 

3) 계몽을 통해 개혁을 실천한 의상(625-702)

* 671년 의상은 당의 침공을 알리려 신라로 귀국하였다.

* 676년 의상은 부석사를 창건하고 제자들에게 화엄 사상을 가르쳤다= 화엄종의 시작

- 이렇게 해서 의상의 10대 제자와 화엄 사찰들이 마들어진다.

- 이후 화엄종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교종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된다.

 

cf) 화엄 사상

불교의 세계관, 또는 우주관으로서 우주의 모든 사물은 서로 인연이 있어 발생하기도 하고 소멸하며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 원인이 되기도 하고 하나로 융합되기도 한다는 생각

 

 

76. 나라를 수호하고 흩어진 민심을 통합하다

1) 신라를 수호하고 영원한 번영을 발원한 문무왕과 김유신

(1) 30대 문무왕(재위 661-681)

* 승려 명랑으로 하여금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창건하게 하여 김춘추에게 밀려났던 자장계와의 관계를 일부 회복한다.

* 불교식 화장+ 전통신앙인 용 숭배

- 문무왕은 불교식 장례법인 화장으로 장례를 치른 최초의 왕이다.

- 문무왕은 호국용이 되어 신라를 수호하겠다고 발원한다.

 

(2) 김유신

* 김유신은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 때인 835년에 흥무대왕으로 추증되었다.

- 당대에는 도리천의 천신으로, 후대에는 왕으로 승격되었다.

 

2) 흩어진 민심의 통합과 진정한 평화를 위한 염원

(1) 682년 제31대 신문왕(재위 681-692) 때에 감은사 완공

 

(2) 만파식적은 태평성대를 상징하는 신성한 피리이다.

- 호국용이 된 문무왕은 전통 신앙을 대변+ 도리천의 신이 된 김유신은 불교를 상징+ 움직이는 섬은 신선 사상+ 대나무가 합쳐진 것은 문무왕과 김유신의 뜻이 모아졌다는 의미+ 태평을 여는 평화의 피리는 유교의 이상인 음악을 통한 조화의 정치를 의미.

 

3) 정토 신앙의 확대와 교종의 발전

(1) 정토 신앙의 확대

* 미륵 신앙의 퇴조와 아미타 신앙의 확대

 

(2) 불교 사상적으로 오교 즉 율종, 열반종, 법성종, 화엄종, 법상종으로 대표되는 교종의 발전이 나타난다.

- 열반종과 법성종, 화엄종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본성의 완전함에 기초한 것으로 이것이 성선설과 연결되는 한국불교 교종의 핵심 사상이다.

 

a) 율종

- 자장에 의해 비롯된 율종, 즉 계율을 중심으로 하는 계율종이다.

b) 열반종

- <열반경>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

- 고구려의 보덕이 전북 전주로 옮겨 와 발전시킨 것이다.

c) 법성종

- 원효의 본체론적인 일심 사상에 입각하여 발전한 것

d) 화엄종

- 의상의 교화에 따라 발전

e) 법상종

- 현장이 인도에서 배워 온 유식학이 통일신라에 전해진 것이다.

- 사상적으로는 경덕왕(재위 742-765) 때의 승려인 태현에 의해서 정립되며, 신앙적으로는 경덕왕 때의 인물인 진표 율사에 의해서 널리 알려졌다.

 

(3) 밀교

* 명랑의 신인종

* 줕국 선무외에게서 수학한 혜통의 진언종

 

 

77. 중국불교의 꽃이 된 신라의 왕자들

1) 죽음을 무릎쓰고 당으로 가는 왕자들

* 통일신라 시대에 왕족으로 출가하여 중국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로는 원측, 무상, 무루, 지장과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2) 현장 문하의 양대 산맥을 만든 원측(613-696)

* 627년 당나라로 유학

* 법상과 승변에게 <섭대승론>에 입각한 무착 계열의 유식학(= 구유식)을 배웠다.

* 이후 현장의 문하로 들어가서, 현장의 세친과 호법 계통의 유식학(= 신유식)을 배웠다.

* 원측의 서명사파와 규기의 자은사파가 경쟁하였다.

* 원측의 유식학 계통은 신라로 전해져 후일 태현이 신라 법상종을 성립하게 된다.

 

3) 중국 선종의 한 획을 그은 무상(680-756)

* 728년 당나라로 유학

* 서쪽 촉 땅으로 들어가 오조 홍인의 손제자인 처적의 제자가 된다.

* 무상은 정중종 혹은 정중선파를 일으켰다.

- 정중종은 북종에도 남종에도 속하지 않는다.

* 무상의 정중종은 후에 제자 무주에게 전해지지만, 남종선의 발달로 급속하게 쇠퇴하게 된다.

 

4) 당나라와 서하불교의 최고가 된 무루(?-762)

* 무루는 서북쪽 변경 지역인 영하의 하란산에서 수행하였다.

* 안사의 난을 피해 영하로 피난 온 숙종은 즉위 후 꿈에서 금빛의 고승을 보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안사의 난이 평정된 후 숙종은 무루를 장안의 황궁으로 모셨다.

* 무루의 불교는 후에 영하를 중심으로 한 서하왕조(1038-1227)에서 크게 융창하게 된다.

 

 

78. 중국에서 지장보살로 칭송받은 김지장

1) 중국에 널리 알려진 김지장(696-794)

 

2) 신라 왕자가 신앙 대상이 된 구화산

* 710년 당나라 안휘성 구화산으로 수련

* 780년 김지장의 교화로 화성사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된다.

* 79499세의 나이로 입적했으나 시신이 썩지 않자 육신을 그대로 모셨다고 한다.

- 이러한 행적 때문에 중국불교에서 김지장은 지장보살이 인간의 몸으로 나타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김지장이 머물던 구화산은 지장보살의 성산이 된다.

 

cf) 4대 성산

* 문수보살의 성산인 산서성 오대산

* 보현보살의 성산인 사천성 아미산

* 관세음보살의 성산인 절강성의 보타산과 낙가산

* 지장보살의 성산인 구화산

 

3) 지장보살도에 새겨진 신라의 개

* 중국의 지장보살상과 지장보살도는 김지장을 모델로 하고 있기 때문에, 좌우로 민공과 민공의 아들 도명을 모시고 있다.

* 또한 지장보살도에는 선청이라는 개가 등장한다.

* 김지장은 지장 신앙의 현창자라는 의미가 크다.

 

 

79. 동아시아를 넘어서는 신라인들

1) 한국불교 최초의 구법승, 겸익

* 겸익은 백제 제25대 무령왕 때 인도로 유학

- 인도의 상가나대율사에서 5년간 계율학을 공부하고, 26대 성왕 4년인 526년에 인도불교의 다섯 종류의 율장인 오부율을 가지고 귀국.

* 이후 성왕의 후원하에 계율과 관련된 전적 72권을 번역해서 백제 율학의 비조가 된다.

 

2) 신라와 통일신라의 인도 구법승들

* 당나라 때의 숭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는 인도로 유학한 승려 61명이 나오는데 이중 9명이 신라인이고, 1명의 고구려인이다.

* 이외에도 원표, 오진의 기록이 남아 있다.

 

3) 혜초, 20세기에 세계인으로 깨어나다

* 혜초는 한국불교에서 인도로 구법 여정에 오른 승려 중 유일하게 기행문을 남긴 인물이다.

* 719년 당나라로 유학

- 이때 남인도 출신의 고승인 금강계 밀교의 금강지와 스리랑카 출신의 불공금강을 만난다.

* 723년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남

* 727년 인도 기행문 <왕오천축국전>을 집필

* 733년 금가지에게 수학, 741년 불공금강에게 수학

* 780년 오대산에 위치한 건원보리사에서 입적

 

80. 불국토를 통해 대통합을 실천하다

1) 진정한 통일의 필연성에 대한 시대적 요청

* 676년 삼국 통일 직후

- 원효와 의상의 화엄 사상+ 극락정토신앙이 유행

* 이후 정신적으로 삼국 통합을 이루어야 하는 시점에서 불국사가 건축된다.

- 751(35대 경덕왕 10)에 불국사와 석굴암이 착공된다.

 

2) 불국토를 통한 통합과 화엄불국사

* 불국사는 화엄 사상에 입각해 삼국의 정신을 하나로 통합하고 진정한 통일신라의 완성을 추구하고자 했다.

* 불국사 가람의 배치는 불교 전체를 원융하게 통합하려는 의지가 잘 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하는 기본 구조+ 통일신라 이후 유행하는 아미타불의 세계를 병행+ 후면으로 화엄종의 중심 부처님인 비로자나불과 대승불교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관세음보살을 독립 배치

 

3) 성덕왕과 오대산의 문수화엄 사상

* 성덕왕의 형 승려 보천은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에 문수화엄 사상을 바탕으로한 신앙체계를 만들려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 3장 신라불교의 새로운 흐름 >

선종의 발달과 후삼국 시대

 

81. 산중 사찰과 선 수행, 선종이 발달하다

1) 신라 하대 선종의 유입과 구산선문

* 당나라 중기 이후 선종이 점차 중국불교의 주류로 부각되면서 9세기초 통일신라에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된다.

* 신라 하대 선종의 발달을 흔히 구산선문으로 표현한다.

- 나말여초의 중국 선종의 유입과 약진을 나타내는 말이다.

 

cf) 신라 하대

신라 역사에서, 780년 선덕왕이 왕위에 오른 때부터 935년 마지막 경순왕이 물러날 때까지 156년 동안의 시기.

 

2) 신흥 세력의 후원과 구산선문의 발전

* 통일신라는 9세기 중후반이 되면 국가 통제 기능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고 큰 혼란을 겪게 된다.

- 900년 견훤이 후백제 건국/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 건국/ 918년 왕건이 고려 건국

- 936년 고려가 후삼국 통일

* 각 산문이 산을 중심으로 발전한 이유 두 가지

- 이미 도시 안에 좋은 곳은 교종이 점유하고 있기 때문

- 선종는 명상 수행을 중시하기 때문에 수행처로 산이 더 적합하기 때문

* 각 산문은 지방 신흥 세력의 후원을 받기 위해 변방 지역에 세워졌다.

 

3) 선종의 인가 문화와 당나라 유학

* 선종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깨달음에 대해서 스승에게 승인, 즉 인가를 받는다는 점이다.

* 그러므로 구산선문의 개창자들은 모두 당나라에 유학을 한 승려야만 했다.

 

 

82. 구산선문의 발달과 신라에서 고려로의 전환

1) 구산선문의 성립 순서와 홍주종의 약진

(1) 구산선문

* 통일신라 말 7: 가지산문, 실상산문, 동리산물, 성주산문, 사굴산문, 사자산문, 봉림산문

* 고려 초 2: 수미산문, 희양산문

 

(2) 구산선문은 모두 남종선 계통으로, 특히 마조 도일의 홍주종 계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 통일신라 말에 갖춰진 7 산문은 모두 홍주종 계

- 고려 초의 수미산문은 조동종 계이고, 희양산문은 계통이 다소 불분명하다.

 

2) 구산선문 가운데 중요한 산문 네 곳

- 가지산문과 사굴산문은 현대 한국불교의 주류인 조계종의 근원이 된다.

 

(1) 가지산문

* 도의가 창건-> 염거-> 860년경 보조 체징이 보림사에서 완성-> 고려 중후기 일연-> 고려 말 태고 보우

 

(2) 사굴산문

* 범일이 사굴사에서 창건-> 고려 중후기 보조 지눌-> 고려 말 나옹 혜근

 

(3) 성주산문

* 낭혜 무염이 성주사에서 완성

* 신라 하대 경문왕과 헌강왕+ 고려 왕건과 돈독한 관계

 

(4) 수미산문

* 진철 이엄이 왕건의 지지하에 광조사에서 완성

 

3) 구산선문 중 덜 중요한 선문 다섯 곳

(1) 실상산문

* 홍척이 실상사에서 완성-> 수철-> 편운

*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개창된 산문

 

(2) 동리산문

* 혜철이 태안사에서 완성-> 고려 왕건의 스승 도선

 

(3) 사자산문

* 칠감 도윤이 쌍봉사에서 시작-> 징효 절중이 흥녕사(현 법흥사)에서 완성

 

(4) 봉림산문

* 원감 현욱이 시작-> 진경 심희이 봉림사에서 완성

 

(5) 희양산문

* 지증 도헌이 봉암사 창건하면서 시작-> 정진 긍양이 봉암사를 중창하며 완성

 

4) 조동종을 전수받은 사무외대사

(1) 사무외대사- 선각대사 형미, 법경대사 경유, 대경대사 여엄, 진철대사 이엄

* 조동종의 시조인 동산 양개의 제자인 운거 도응 문하에서 891-896년 수학한 네 명의 선승

* 사무외대사가 조동종의 가르침을 잇고 있다는 것은, 통일신라 말의 홍주종 계와 후삼국과 고려 초의 조동종 계에 따른 변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우리나라에서는 홍주종 계가 조동종 계를 압도하게 된다.

* 홍주종이 남성적이고 행동적이라면, 조동종은 여성적이고 잔잔한 선풍을 가지고 있다.

 

 

83. 후삼국, 미륵을 깨어나게 하다

1) 흔들리는 신라

* 상대 신라와 중대 신라

- 성골이 즉위했던 진덕여왕 때까지를 상대 신라라고 하고, 태종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를 중대 신라라고 한다.

* 신라 하대가 되면 통치력에 문제가 생긴다.

 

2) 미륵불을 자칭한 궁예

* 궁예는 스스로 미륵을 자처

 

3) 견훤의 미륵 신앙과 불교적인 다양성

* 견훤은 당시 유력한 화엄종과 선종 및 미륵 신앙의 법상종 등을 활용하여 국가 기반을 다졌다.

 

4) 부처님의 보호로 유지되는 나라, 고려

*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신라 마지막 왕인 제56대 경순왕이 935년 자진해서 고려로 귀부한다는 점이다.

- 따라서 왕건은 신라의 정통성을 그대로 계승하게 된다.

- 그러므로 불교 역시 고려에서도 계속 유지될 수 있게 된다.

* 왕건의 <훈요십조> 1, 2, 6조가 불교에 관한 내용이다.

 

 

 

 

< 4장 고려불교의 변화와 흐름 >

고려 시대의 불교

 

84. 불교를 국교로 삼은 나라, 고려

1) 왕건, 통합의 리더십을 말하다

* 936년 고려의 후삼국 통일

*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 국가

 

2) 불교의 시대, 불교의 나라

* 왕건은 지방 호족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념적으로나 전통적인 측면에서나 불교를 계승할 수 밖에 없었다.

* 당시 불교 안에는 선발주자인 귀족적인 교종과 후발로서의 평민적인 선종의 대립양상이 존재했다.

* 왕건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만 밝히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인간 평등을 주장한 선종을 지지했다.

 

3)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도선의 비보사찰설

* 왕건의 <훈요십조> 2조에는 고려의 모든 사찰은 도선(동리산문의 도선)이 산수의 형세를 감안하여 조율해 놓은 것이니, 함부로 추가하면 지기가 훼손되어 왕조가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 비보사찰설, 비보사탑설

- 사찰이나 탑을 통해 산천의 기운을 보충한다는 의미

* 비보사찰설은 이미 성립된 홍주종 계가 독주하는 한 배경이 되기도 한다.

 

 

85. 승과 제도의 시행과 불교 종파의 통합

1) 광종의 왕권 강화와 안정되는 고려

(1) 4대 광종(재위 949-975)은 고려 성립 과정에서 대두한 호족 세력을 혁파하고 왕권을 강화했다.

* 958년 과거제 실시

 

(2) 광종은 신라 하대부터 방만해진 불교를 정비하기 위해 승과 제도를 시행한다.

- 승과 실시는 지방 호족들과 연결되어 있는 승려들을 견제하고, 국교로서 불교의 기틀을 확립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 921년 승과제 실시

* 968년 이사제도(국사와 왕사 제도)를 완비

 

2) 불교 교단의 통합과 화엄종의 균여(923-973)

* 후삼국 시대 화엄종은 희랑의 북악파와 관혜의 남악파로 나뉘어 졌다.

* 균여는 북악파와 남학파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더 나아가 성상융회를 주장했다.

- 성상융회는 당시 교종 가운데 세력이 가장 강력했던 화엄종과 법상종을 융합하자는 주장이다.

* 그러나 광조의 후원을 받은 균여의 교종 통합은 실패하게 된다.

 

3) 광종의 법안종 도입과 선종의 통합 노력

* 광종은 남종선에서 새롭게 성립한 법안종을 도입해 선종을 통합하려 했으나 법안종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975년 광종이 사망함으로써 선종 통합 노력은 실패하게 된다.

- 법안종은 남종선과 화엄 사상을 융합한 관점을 제시했다.

- 법안종 제3조 영명 연수는 교종과 선종, 그리고 염불까지 아우르는 대통합을 주장하였다.

 

4) 의천의 송나라 행과 천태종의 개창

*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천태종을 도입하고 개창

- 1085년 송나라로 유학

- 1097년 개경에 국청사 완공하면서 천태종을 전파시킴

 

5) 의천의 불교 통합 노력과 교관겸수

* 의천 당시 고려불교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한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 그리고 선종이다.

* 의천은 교와 선을 함계 수행해야 한다는 교관겸수를 주장

* 그러나 국청사가 완공된 4년 뒤인 1101년 의천이 사망하면서 고려불교를 통합하려는 의천의 노력 역시 빛을 잃고 만다.

 

 

86. 팔만대장경의 판각과 의천의 교장 간행

1) 거란의 1차 침략과 고려의 실리 외교

* 993년 거란의 1차 침입

-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300리 할양 받음.

 

2) 거란의 2차 침략과 초조대장경의 탄생

* 1010-1011년 거란의 2차 침략

- ‘강조의 정변을 명분으로 고려 침략

* 1011-1031년 초조대장경 판각 시작

* 1087년 초조대장경 완성

 

3) 몽골의 침략과 재조대장경의 역사

* 1231년 몽골의 침략

* 1236년 대장도감을 설치해 재조대장경(= 팔만대장경) 판각 시작

* 1251년 재조대장경 완성

 

4) 의천의 원대한 이상과 고려의 찬란한 문화

* 의천은 1074년 부왕인 문종에게 동아시아 전체에 유통되던 삼장의 주석들을 모아서 하나의 총서로 만들자고 건의했다.

* 1091년 의천의 교장 판각 시작/ 1097년 의천의 교장 판각 중단

- 의천의 교장간행은 동아시아 대장경 역사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87. 지눌, 교학을 포함한 선종을 천명하다

1) 한국 선종의 중흥조 지눌

* 지눌이 활동하던 시기 고려 왕실은 화엄종과 함께 신흥 종파인 천태종과 연결되어 있었고, 선종은 천태종의 수립으로 큰 타격을 입고 주춤하던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무신 정권은 집권이 장기화되면서 자신들의 정권 안정을 위해 선종을 주목하게 된다.

 

2) 지눌의 깨달음과 정혜결사

* 1190년 지눌, 정혜결사 조직

- 정혜결사란, 선종의 수행과 화엄 중심 사상 중심의 교종을 아울러 수학해서 깨달음을 증득하자는 수행결사운동이다.

- 이는 의천의 교관겸수, 즉 교종과 선종을 아우르려고 했던 것과 대비되는,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융합하려는 노력인 셈이다.

 

3) 지눌의 삼종문에 담긴 뜻

(1) 지눌의 삼종문

a) 성적등지문은 수행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 지혜로 무지를 밝히고 선정으로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켜 공부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이다.

b) 원돈신해문은 깨달음의 원리를 이해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 이치적인 판단에 따른 것으로, 이해를 통함 깨달음으로써 지눌이 화엄 사상을 선으로 받아들이는 부분이다.

c) 간화경절문의 간화란, 화두를 관조한다는 것이며, 경절은 모든 것을 완전히 끊어 버린다는 의미이다.

 

(2) 삼종문은 성적등지문을 통해 수행의 기본을 확립하고 원돈신해문을 통해 이치를 깨달은 뒤에, 간화경절문으로 최종 완성한다는 것이다.

 

4) 진각국사 혜심(1178-1234)과 주류가 되는 선종

* 지눌의 정혜결사는 천태종에 의해 타격을 받았던 선종을 화려하게 부활시키는 초석이 된다.

* 이후 지눌의 가르침은 혜심에게 전해지는데, 지눌을 현양하고 수선사의 선풍을 고려불교 안에서 최고로 끌어올리는 데에는 혜심의 역할이 지대하다.

* 1226년 혜심은 <선문염송>을 편찬

* 이후 지눌의 수선사 계는 선종의 주류를 형성하면서, 지눌과 혜심을 포함해 16국사가 배출되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 고려 후기의 불교가 선종이 되는 것에는 지눌과 혜심의 영향이 크다.

 

5) 지눌 주장의 문제점과 과제

(1) 지눌은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융합하고, 중국과는 다른 한국 선불교의 재해석을 시도했다.

 

(2) 지눌 주장의 문제점

a) 그러나 지눌이 주장하는 돈오점수는 홍주종의 돈오돈수설과는 차이가 있다.

- 지눌이 남종선의 정통인가에 대한 문제

b) 지눌이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신화엄경론>을 쓴 이통현 역시, 화엄 사상에서는 적통이 아닌 방계로 치부되는 인물이다.

 

 

88. 혼란의 시대에 불교를 기록한 일연

1) 대몽항쟁기의 시대 상황

* 일연의 생애는 대부분 대몽항쟁기(1231-1270)과 겹쳐진다.

* 일연은 파괴되는 불교 기록을 보전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국민들을 단합시키려 했다.

- 일연은 <삼국유사> 외에 100여권에 달하는 저술을 남겼으나 현존하는 것은 <삼국유사><중편조동오위> 뿐이다.

* 1281년경 일연의 <삼국유사> 저술

 

2) <삼국유사>의 저술 목적

* <삼국유사>의 유사란 빠진 것을 보충한다는 의미이다. <삼국사기>를 보완하는 또 다른 한문 기록이 바로 <삼국유사>인 셈이다.

 

3) 대몽 항쟁과 호국 불교

* 단군 신화가 기록으로 나타난 것은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 단 두 가지뿐이다.

- 대몽항쟁기를 겪는 상황에서 삼국 공통의 조상인 단군의 이야기를 통해 민족을 단합하고 외세를 물리치고자 하였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4) 대몽항쟁기에 만들어지는 금강산

* 대몽항쟁기에 금강산과 담무갈보살이 연결되고, 원 간섭기(1270-1356)에 확정되면서 완성되었다.

- 이 시기 금강산이 불교의 성산으로 완성되었다.

- <반야경>의 핵심 보살인 담무갈보살(법기보살)이 조명되면서, 금강산은 담무갈보살의 거주처로 확정된다.

 

 

89. 선종을 중심으로 자정 노력이 이루어지다

1) 원 간섭기와 티베트불교의 영향

* 원 간섭기(12070-1356)에 고려불교는 원나라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있던 티베트불교의 영향을 받아 극도로 타락하게 된다.

- 당시 티베트불교에서는 결혼이 허용되는 홍모파가 주류였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고려불교는 극도로 혼탁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2) 선종을 통해 다시금 청정성을 회복하는 불교

* 당시 중국불교는 원나라의 지지를 받는 티베트불교와 한족 중심의 강남을 중심으로 하는 선종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 원의 지배력이 약해지는 중기 이후가 되면 중국의 강남불교와 고려불교의 전통이 되살아 나면서 선종을 중심으로 자기바판과 자정 노력이 나타난다.

- 송원교체기의 승려인 몽산 덕이와 고봉 원묘가 활동

- 몽산은 깨달은 뒤에는 반드시 인가를 받아야 하나다는 오후인가를 강조

- 몽산의 영향으로 14세기 고려의 선승들이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원나라로 들어가 임제종 계통의 승려의 인가를 받는 것이 유행하게 된다.

 

3) 여말삼사와 여말삼화상이 만들어 낸 선의 황금시대

(1) 1326-1328년 인도 승려 지공이 고려에서 활동하였는데 당시 고려불교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다.

 

(2) 여말삼사

* 여말삼사는 고려 말,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선승

* 태고 보우(가지산문), 나옹 혜근(사굴산문), 백운 경한

* 1377년 백운이 청주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직지심체요절>을 인쇄

 

(3) 여말삼화상

* 지공-> 나옹-> 무학 자초

: 지공에서 나옹 그리고 무학 자초로 이어지는 고려말, 조선 초의 선종을 주도한 스승과 제자 관계인 세 사람을 가리킨다.

* 여말삼화상은 조선 시대 불교 의식과 관련해서 등장하는 증명삼화상이기도 하다.

 

(4) 여말삼사와 여말삼화상에 의해 고려불교는 티베트불교의 영향에서 신속하게 벗어나면서 청정성을 회복하게 된다. 즉 고려 말 한국 불교사에서 선의 황금시대였다. 그러나 고려가 조선으로 교체되면서, 이 황금시대는 너무나도 아쉽게 끝이 나고 만다.

 

 

90. 꺼져 가는 불교 부흥의 등불과 고려

1) 공민왕과 불교계 세 명의 파트너

(1) 공민왕 대의 불교 3 시기

a) 1356-1367년 보우를 왕사로 임명하고 광명사에 원융부를 설치해서 구산선문을 통합하려고 시도하는 시기이다.

b) 1367-1370년 화엄종 승려인 편조(신돈)를 재가인이 되도록 하여, 신돈과 함께 공민왕이 일련의 개혁 정책을 시행하는 시기이다.

c) 1370-1374년 공민왕이 나옹과 함께 한 시기

- 1371년 나옹은 왕사로 임명되었고, 강남 임제종(오산불교)의 사원 체계를 중심으로, 티베트불교를 완전히 걷어내 고려불교를 일신하고자 한다.

 

2) 나옹의 돌연한 입적과 반전

* 나옹은 양주 회암사를 중창한다.

*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되고 나서 이인임 계에 의해 유배된다.

* 1376년 나옹의 돌연한 입적

* 나옹 사후 나옹은 생불로 신격화 되고, 회암사는 여말선초의 최대 사찰이자, 조선 중기까지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의 위상을 유지한다.

 

3) 나옹의 두 걸출한 제자, 혼수와 무학

(1) 혼수

* 1383년 우왕에 의해 국사가 된다.

* 1392년 입적

* 조선 중기로 넘어가면서 조선불교 계통은 혼수 계열만 남게 된다.

- 혼수는 나옹과 보우 두 스님에게 수학했는데 무학이 나옹의 계승자라는 위치가 확고해지자, 혼수 계는 보우의 계승자라는 인식이 강해지게 된다.

- 결국 <나옹-> 무학><보우-> 혼수>라는 관점이 확립되는 것이다.

 

(2) 무학

* 1392년 무학이 왕사가 됨.

* 무학은 이성계의 후원을 받으며, 조선이 건국된 다음해인 1993년부터 나옹 계승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한다.

* 조선 초기 불교는 무학계가 장악

- 무학계: 무학-> 함허 득통-> 신미-> 학열, 학조

- 그러나 무학계는 이후 이렇다 할 인물이 나오지 않으면서 결국 단절되고 만다.

 

 

 

 

< 5장 억눌린 불교와 민중의 염원 >

조선 시대의 불교

 

91. 불교 교단의 통폐합과 사찰 수의 축소

1) 조선의 개국과 표적이 된 불교

* 고려 말 안향에 의해 성리학이 전래되면서 불교에 대한 비판이 점차 거세게 된다.

* 조선의 건국과 함께 불교는 개혁과 배척의 대상이 된다.

 

2) 태종, 세종 대의 불교 교단 통합

(1) 태종의 불교 교단 통폐합

* 태종 때 당시 유력했던 11개 종파를 7종파 242개 사찰로 통폐합

 

(2) 세종의 불교 교단 통폐합

* 세종은 선종과 교종 두 가지로 축소

 

3) 민중과 유리된 불교의 한계

* 불교 몰락의 내적 원인

a) 불교가 민중과 유리되어 있다는 점

b) 불교의 힘을 하나로 결집하고 구심점이 되어 줄 고승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92. 성리학의 비판에 직면한 불교

1) 고려 말 신진 사대부들의 불교 비판

* 고려 말에 대두한 신진 사대부 세력의 불교 비판 이유 세 가지

a) 고려 말에 들어온 주희의 성리학이 국수적이고 외래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b) 성리학이 위진남북조부터 당나라까지 불교가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시대를 거쳐 완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부분을 내포한 정치 철학으로 변모하였다는 점이다.

c) 권력 및 재산과 관련된 현실적인 부분이다.

 

2) 정도전의 <불씨잡변>

* 1397년 정도전 <불씨잡변>을 저술

 

3) <불씨잡변>의 관점과 성리학에 입각한 이론적 비판

* <불씨잡변>의 세 가지 불교 비판

a) 윤회론이나 출가, 또는 천당과 지옥과 같은 인도 문화에 대해 중국 문화를 배경으로 한 비판이다.

b) 불교 이론의 문제점을 성리학의 관점에서 비판하는 부분이다.

c)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불교를 믿으면 재앙을 받거나 국가의 존손 기간이 단축된다는 것 등이다.

 

4) 불교적 반론의 한계와 불교의 몰락

* <현정론><유석질의론>

- 불교와 유교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조화론을 주장한 책이다.

- 이러한 불교계의 반론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93. 한글 창제에 힘을 모은 왕실과 승려

1) 집현전이 아닌, 별도의 조직이 창제한 한글

* 1446년 세종, 훈민정음 반포

 

2) 인도 문자와 관련한 한글 창제

* 한글 창제와 관련한 실무 책임자는 수양대군

* 신미와 제자인 학열이 중심이 되어 우리 전통의 이두와 인도 문자의 특징이 합해져 한글 창제가 이루어지게 된다.

 

3) 불교 문헌에 기초한 초기 한글

* 초기 한글은 세종의 <월인천강지곡>과 수양대군의 <석보상절>과 같은 불교 문헌으로 시작된다.

 

4) 고려불교의 마지막 불꽃, 세조의 삼화상

* 세조의 삼화상: 신미와 그의 두 제자 학열과 학조

* 신미와 학열, 학조는 고려불교를 계승한 조선의 마지막 승려들이다.

이들을 끝으로 고려불교의 승려들이 귀족과 지식인이었던 것과 달리, 조선불교는 평민과 문자를 아는 정도의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94. <경국대전>이 결정한 조선불교의 그늘

1) 불교 차별을 조문화한 <경국대전>

* 1485년 성종 16<경국대전> 공포

* <경국대전> 형전에 신도와 수입원을 모두 차단한다는 내용이 있다.

* <경국대전> 예전에 도첩제에 관한 내용이 있다.

- 그러나 1492년 성종은 도첩제를 폐지하고 <금승법>을 제정하였다.

 

2) 새로운 인재의 유입을 막은 연산군

* 연산군은 왕실의 원찰을 제외한 모든 사찰의 노비와 토지를 조사하여 몰수하고, 성종 때 제정된 출가 금지법을 더욱 엄격히 적용하도록 하였다.

 

3) 중종의 즉위와 <경국대전>에서 사라진 불교

* 중종 2년인 1507년에는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던 승과가 완전히 폐지되고, 중종 11년인 1516년에는 <경국대전> <예전>도승조가 삭제된다.

 

 

95. 문정왕후의 불교 후원과 허응 보우의 불교 중흥

1) 문정왕후가 피워낸 조선불교의 불꽃

- 1542-1522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 7대 세조는 불교적인 임금/ 9대 성종, 10대 연산군, 11대 중종은 불교를 탄압

* 11대 중종의 두번째 정비 문정왕후는 조선 역사상 가장 불교를 옹호했던 왕실의 여성이다.

* 1550년 회암사의 허응 보우는 문정왕후의 후원으로 승과를 복구 시킨다.

- 승과는 문정왕후가 사망하는 1565년까지 유지된다.

- 이 시기에 승과에 합격한 인물은 청허 휴정과 사명 유정이다.

 

2) 문정왕후의 대대적인 불사 흔적

* 문정왕후는 많은 수의 불화를 후원하였다.

* 그러나 1565년 문정왕후가 사망하면서, 불교는 다시금 탄압의 역사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3) 불교 중흥을 시도한 보우

* 보우는 불교 중흥을 시도했으나 문정왕후가 사망하게 되자 귀향 가서 죽음을 당한다.

 

4) 불타는 회암사와 사라지는 조선불교의 불꽃

* 보우는 문정왕후의 후원하에 1563-1565년에 회암사를 중건했다.

* 1566년에서 1595년 사이 회암사는 유생들의 방하로 소실되었다.

 

 

96. 국가의 위기 속에서 타오르는 불교

1) 농업을 중시한 조선의 한계와 임진왜란

*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중국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업 국가이다.

* 조선은 200년이 흐르자 한정된 토지만으로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2) 국가와 민중을 위해서 전쟁터로 뛰어든 불교

* 승병 중 유명인은 청허 휴정과 사명 유정이다.

 

3) 서산대사의 승군 독려와 사명당의 활약

* 1592년 당시 73세의 고령이었던 서산대사 휴정은 팔도도청섭이라는 모든 승려를 총괄하는 지위를 부여 받고 승군을 독려하였다.

* 사명당 유정은 승병을 이끌고 많은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후 1604년 유정은 일본으로 건너가 강화를 체결하고 돌아왔다.

 

4) 국가와 민족을 위한 불교와 조선의 배신

* 승군이 참전하자 일본은 무차별적으로 사찰을 파괴하였다.

* 임란 이후 조선 조정은 승려들을 남한산성과 북한산성을 축조 및 관리하는데 이용한다.

 

 

97. 통제되지 않는 국가와 불교의 발전

1) 불교에 대한 견제 약화와 민중에게 다가가는 불교

* 조선 후기의 국가 기능의 약화는, 조선불교가 민중불교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

 

2) 유교의 영향을 받으며 발전하는 조선 후기의 불교

(1)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불교는 임진왜란에서 입은 피해를 회복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의 불교는 선교통합적인 측면을 바탕으로 철학적이나 수행적이기라기보다는 민중적인 색깔을 띠면서 발전한다.

 

(2) 이 시기에 불교는 유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

a) 문집의 발간이 늘어난 데 비해 연구서 발간은 저조했다는 점이다.

b) 조상 숭배와 관련된 부분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c) 상명하복의 서열 구조가 엄격해졌다는 점이다.

 

 

98. 초의와 추사, 차와 불교를 논하다

1) 우리나라 차문화의 완성자 초의(1786-1866)

* 초의는 전남 대둔산 대흥사 옆에 일지암을 창건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다선일미, 즉 차와 선은 한 맛일 뿐이라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2) 다산에게 수학하고 추사와 교류하다

 

3) 초의와 백파의 선에 대한 논쟁

* 백파는 임제종만이 최고의 가르침임을 천명

* 초의는 선교(선종과 교종)의 원융한 관점의 타당성을 제기

 

4) 천재였던 추사의 패기와 신심

 

 

99. 구한말의 불교와 불교로 모인 지식인들

1) 유령국가가 된 조선과 벼랑 끝의 불교

* 조선의 권력은 조선 중기를 거치면서 사림으로 넘어가고, 사림 안에서 율곡을 따르는 서인으로, 그리고 다시금 서인 안에서 송시열에 의한 노론으로 좁혀진다.

* 그러나 19세기 들어 강력한 외척이 등장하면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시대가 열렸다.

* 국가 통제 체제의 붕괴에 따른 경제 궁핍에 양반의 가혹한 수탈까지 더해지면서, 조선 불교는 영정조 시대의 화려한 부활을 뒤로한 채 벼랑 끝으로 내몰리게 된다.

 

2) 개화파의 이념으로 새롭게 부각한 불교

* 1864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단행

* 1884년 갑신정변(김옥균의 3일 천하)

- 개화파는 인간 평등을 주장하는 불교에서 새로운 대안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3) 억압이 사라진 불교

* 1895년 김홍집 내각의 입성해금

- 승려의 도성 출입을 허용하는 것

 

4) 일본불교의 확대를 막기 위해 창건된 원흥사

* 1902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침략과 일본불교의 확대를 막기 위해 원흥사(현 창신초교자리)를 창건하였다.

* 1908년 원흥사에서 최초의 현대적 종단인 원종이 만들어진다.

* 1910년 도성 출입이 해제된 이후 최초로 사대문 안에 각황사가 창건된다.

- 1962년 각황사는 조계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00. 일제강점기 불교의 명암과 조계종의 성립

1) 억압받은 조선불교와 도움을 준 일본

* 1872년 일본불교는 승려의 육식과 결혼은 각자 임의에 맡기며 대처승을 용인한다.

* 일본불교의 영향을 받은 조선불교 또한 승려가 결혼하는 풍조가 만연하게 된다.

 

2) 일본불교의 영향과 과제

* 일제강점기 승려의 대다수가 결혼하는 한국불교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 일본과 일본불교의 암묵적인 비호 아래, 한국불교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많은 성장을 거두었다.

 

3) 일제강점기 한국불교를 지켜 낸 선지식들

(1) 일제강점기 한국불교를 지켜낸 선각자

a) 석전

* 불교학을 중심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

b) 용성

* 한용운과 더불어 민족대표 33인에 속하는 인물

* 불교 개혁을 위해서 신불교 운동인 대각교를 개창하고 불교 경전의 한글화 등에 매진하였다.

c) 한암

* 총 네 차례에 걸쳐 교정과 종정에 추대되는 희대의 선승이다.

 

(2) 현대의 대한불교조계종은 선불교의 전통에 입각해서 1962년 재정립된 종단이다.

* 이 조계종의 원류에는 고려 시대에 남종선을 조계종으로 판단한 인식과 일제강점기 초반인 1911년의 임제종, 그리고 1941년에 성립되는 조선불교조계종이 있다.

: 1911년 임제종->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 1962년 대한불교조계종

 

cf) 불교정화운동

* 1954-1962년 불교정화운동

- 불교정화운동을 통해서 새롭게 재건되는 불교가 현재의 대한불교조계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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