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Lavo Kingdom > 450-1388년
https://en.wikipedia.org/wiki/Lavo_Kingdom
* 라보 왕국은 드바라바티 문명 말기인 7세기 무렵부터 1388년까지 차오프라야 계곡 상부 차오프라야 강 left bank에 있었던 정치적 실체(만달라)였다. 라보 문명의 원래 중심지는 라보(현대 롭부리)였으나, 현대 역사 분석에 의하면 11세기경 수도가 아요다야(Ayodhaya/ 아유타야 근처 항구도시)로 남하하였고, 그 결과 14세기에 아유타야 왕국에 통합되어졌다.
cf) 아요다야(Ayodhaya)= the port city on the right side of the Ayutthaya island
* 6-11세기 드바라바티(몬족의 국가들- 소승불교) 성립-> 450년 라보, 드바라바티의 도시국가로 시작-> 7세기경 크메르 제국의 공격을 받고 동쪽 도시들은 Lavo Kingdom(첸라의 속국/ 몬족?)이 되고, 서쪽 도시들은 수완나부미가 된다-> 11세기 경 따이족(타이족)이 이주-> 1087년 나라이 왕 수도를 아요다야(아유타야 근처 항구도시)로 이전-> 1239년 수코타이, 라보 로부터 독립 & 라보는 급속히 위축-> 1350년 아유타야 성립(라보+ 수완나부미)-> 1388년 아유타야, 라보 병합-> 1438년 아유타야, 수코타이 병합
* 수도
Lavo (648–1087)
Ayodhaya (1087–1349)
Ayutthaya (1350–1388)
** 도시 위치 정보
< History >
1. Dvaravati and Mon domination
드바라바티 지역(현대의 태국)은 수세기 전에 도착한 몬족들이 처음 거주하였다. 동남아시아 중부의 불교의 기초는 6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태국의 중부와 북동부에 몬족과 연결된 테라바다(소승불교) 불교 문화가 발달하면서 생겨났다. 테라바다인들은 깨달음은 승려의 삶을 사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규범 안에 수많은 불상과 보살의 texts을 인정하는 마하야나(대승불교) 불교도와 달리, 테라바다는 이 종교의 창시자인 고타마 부처만을 숭배한다. 현재 라오스와 태국의 중앙 평야에 자리잡은 The Mon Buddhist kingdoms은 총칭적으로 드바라바티라고 불렸다.
2. The Mon of Lavo
라보의 전설적인 초대 왕이자 몬의 통치자인 프라야 칼라바르나디트는 450년 경 드바라바티 도시국가 중 하나로 도시를 세웠다고 한다. 칼라바르나디트는 19세기까지 샴족과 버마족이 사용하던 연대기 Chula Sakarat라는 태음태양력을 확립했다.
칼라바르나디트는 고대 남아시아 도시 라바푸리(현재의 라호르)를 지칭하며 'city of Lava' 라는 뜻의 힌두교 이름 '라바푸라'에서 유래한 왕국의 이름으로 '라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3]
초기 라보 시대에 발견된 유일한 모국어는 몬어다. 하지만, 몬이 라보의 유일한 민족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라보가 몬족이 지배계급을 이루며, 몬족과 로라족(팔라웅어를 쓰는 민족)[4][5]이 혼혈로 이루어졌다고 지적한다. 라보 왕국 시대에 차오프라야 계곡으로의 타이족의 이주가 일어났다는 가설도 있다.
크메르 제국의 힌두교와 마하야나 불교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라보 불교는 여전히 라보에서 주요 신앙으로 남아 있었다.[6] 7세기 말경, 라보는 북쪽으로 확장되었다. 카메데비바사(Camadevivaṃsa)를 비롯한 북부 타이 연대기에는 몬 왕국 하리푼차이의 초대 통치자인 카마데비가 라보 왕의 딸이라고 한다.
라보 왕국의 성격에 관한 기록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우리가 라보에 대해 알고 있는 대부분은 고고학적 증거에서 나온 것이다. 당 왕조는 라보 왕국이 당나라에 Tou-ho-lo로서 조공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슈안짱 스님은 그의 일기에서 드바라바티-라보를 Tou-lo-po-ti 라고 불렀는데, 첸라와 파간 왕국 사이의 국가로서 드바라바티라는 이름이 알려지길 바랬던 것 같다? 송나라에 의해 라보는 Luówō(뤄보)로 알려져 있었다.[citation needed]
3. Khmer domination
첸라 왕국의 이사나바르만 1세는 7세기경 그의 정복활동을 통해 크메르의 영향력을 차오프라야 계곡으로 확장시켰다. 크메르 패권 아래 떨어진 드바라바티 도시들은 Lavo가 되었고, 서쪽의 도시들은 크메르 패권으로부터 벗어나 수완나부미(Suvarnabhumi)를 형성하였다.[8] 라보는 크메르 정권이 드바라바티를 지배했던 중심지였다.
10세기경 드바라바티의 도시국가들이 두 개의 만다라, 즉 라보(현대 롭부리)와 수완나부미(현대 수판부리)로 합쳐졌다. 북부 연대기의 전설에 따르면 903년 탐브라링가 왕이 라보를 침공하여 점령하고 말레이 왕자를 라보 왕좌에 앉혔다고 한다. 이 말레이 왕자는 앙코르 왕조의 숙청을 피해 도망친 크메르 공주와 결혼했다. 이 부부의 아들은 크메르 왕위를 경쟁하다가 수르야바르만 1세가 되었고, 그리하여 라보를 개인적인 결합을 통해 크메르 지배하에 이르게 했다. 수리아바르만 1세도 Isan 으로 확장하였고 많은 사원을 건설하였다.
1) Arrival of Tai
현대 태국 역사학자들은 따이족(Tai peoples)이 베트남 북부와 중국의 광시성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한다.[9] 따이족의 기원은 8세기까지 동남아시아의 북부에 살고 있었다.[10]
5개의 linguistic groups이 나타났다.
(1) the northern Tai in China (ancestors of Zhuang)
(2) the upland(고원) Tai people in northern Vietnam (ancestors of the Black, White and Red Tai)
(3) the Tais in northeastern Laos and bordering Vietnam (ancestors of the Tai of Siang Khwang and the Siamese in Ayutthaya)
(4) the Tai in northern Laos
(5) the Tai west of Luang Prabang, northern Thailand and in the adjoining parts of Laos, Yunnan and Burma
따이족은 11세기경 현재 태국으로 이주했고, 그 땅에는 이미 이전에 도착한 몬과 크메르어를 말하는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2) Tai Villages and Mueang
따이족은 동남아시아 본토에 있는 저지대와 강 계곡에 살았다. 다양한 인종과 언어 집단이 언덕에 살았다. 타이 마을은 핵가족이 자급자족 쌀 농부로 일하면서 땅 위로 솟은 작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외부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공동 수리 및 유지보수에 대한 부담을 공유하기 위해 서로 가족들은 연대했다. 가구. 마을 내에는 정착 문제 해결과 축제와 제사를 조직하고 마을을 관리하는 데 도움이 되는 노인 협의회가 만들어졌다. 마을은 Chao(lord)에 의해 다스려지는 마을 공동체- Mueang(무앙)의 형태로 결합했다. 따이족이 태국의 중앙 평원에 정착했을 때 캄보디아 통치자는 타이족을 중국에서 온 야만인으로 보고 크메르어로 Siem으로 명명했다.[citation needed] 타이 지배자들은 몬 알파벳과 크메르 알파벳 둘 다 채용했으며, 타이인들은 북쪽의 Thai Yuan을 위해 Tai Tham 알파벳을, 저지대의 the Siamese Tai에게는 Khom-Thai 알파벳을 그들 자신의 문자로 발전시켰다. The Siamese은 스스로를 Tai 또는 Thai라고 불렀고, 타이 방언으로 라보(Lavo)를 롭부리(Lopburi)라고 불렀다.
크메르 제국의 시골 근교와 upper Laos에 정착한 따이족은 영주들에 의해 연합되어 크메르 제국에 가공할 위협이 되고 있었다. 따이족과 크메르족 지배층의 결혼에도 불구하고, 따이족은 그들 자신의 언어와 사회조직의 단위를 유지하며 뚜렷한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했다
4. Tai city states appearance
* Siamese Lopburi (11th century)
앙코르 제국이 행사한 가공할 정치적 통제는 인구의 대다수가 크메르인인 크메르 지방의 중심부뿐만 아니라 비 크메르족이 거주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외곽 국경 지방(현대 방콕의 북쪽과 북동지역, Lamphun-Chiang Mai region의 저지대 중앙 평원과 upper Pink river)까지 확장되었다.
따이족은 크메르 제국의 지리적 변방을 형성한 태국 중부의 지역에서 우세한 비 크메르 집단이었다. 타이 그룹은 아마도 크메르 인구에 동화되었을 것이다. 역사적 기록은 비록 그들의 애니미스트 종교가 부분적으로 불교에 자리를 내주긴 했지만 그들이 문화적 특수성을 유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태국의 역사 문서들은 앙코르 제국의 시대는 큰 내분 중 하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11~12세기 동안 롭부리(현재의 태국 중북부 지역에 있음)와 같이 강력한 타이인 거주 영토가 크메르 지배에 저항하였다.[1]:28
11세기 롭부리는 앙코르의 크메르 제국의 속주국가의 일부로서 캄보디아 왕자의 지배를 받았으나, 롭부리는 해방을 원했고, 1001년과 1155년 독립국으로서 중국(송나라)에게 승인을 구했다. 롭부리의 많은 타이 인구와 드바라바티족의 뿌리는 크메르 문명과 잘 동화되지 않았으며, 크메르 저술에서 롭부리는 Syamese (Siamese) identity을 가진 앙코르 지방으로 여겨졌다.[1]:29
라보에 대한 크메르의 영향력은 파간에 나타난 버마 왕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1087년 파간의 칸시트타가 라보를 침공했지만, 라보의 나라이 왕은 버마족의 침략을 물리칠 수 있었고, 그 만남에서 비교적 강하게 부상한 라보는 이에 따라 크메르나 버마 패권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나라이 왕은 수도를 아요다야(Ayodhaya/ 현대의 아요타야?)로 옮겼고, 라보는 그 후 서쪽으로 수완나부미를 압박하고 천천히 그들의 도시들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야바르만 7세 휘하에 또 다른 크메르 침공이 있었다. 이때에 라보는 크메르 제국의 종교적 코스모스, 즉 힌두교와 마하야나 불교에 동화되었다. 크메르는 the Prang Sam Yot에서 보듯이 라보 예술과 건축에 큰 영향을 미쳤다.
1239년 수코타이 태수(太守)가 반란을 일으켜 라보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여 수코타이 왕국을 탄생시켰다. 타이 연대기에는 라보를 "Khmer"라고 불리워지고, 13세기 동안 라보 왕국은 람캄행 대왕 휘하의 수코타이가 팽창하면서 라보와 아요다야 주변의 중심지로 후퇴하면서 급속히 위축되었다.
라보 왕국의 로후는 1289년에서 1299년 사이에 중국에 대사관을 보냈다.
아요다야의 제10대 왕(나라이 왕을 제1대 왕으로 쳤을때) 보라체트 왕은 아유타야 왕국의 Uthong과 같은 인물이라는 가설이 있다. 라보의 우통과 수완나부미의 보로마차티라트 1세(파응우)가 공동으로 새로운 아유타야를 설립하였고, 우통이 그 도시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파 응우는 1370년 우통의 아들 라메수안에게서 아유타야를 빼앗았고, 라메수안은 홈랜드 라보로 돌아갔다. 1388년 라메수안은 아유타야를 파 응우의 아들 툰란에게서 되찾아 복수를 했다.
파 응우의 조카 인타라차(Intaracha)는 1408년 아유타야를 수완나품(Subannabhum)으로 되찾았다(수판부리 왕조의 인타라차는 아유타야를 정복하여 아유타야의 6대왕이 되었다). 그 후 라보 왕조는 숙청되어 16세기까지 아유타야의 단순한 귀족 가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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